| ‘기의 고장’ 영암의 변천사 심심풀이 우리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1년 03월 08일(월) 1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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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계의 객관적 검증을 받기 위해 우리 영암인 모두가 다각적인 연구와 노력이 계속 필요하며 차제에 기의 고장인 우리 영암의 변천사를 살피고 애향심을 고취코자 한다.
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9세기 전반 동북아 3국의 국제무역을 주름잡았던 통일신라의 청해진 대사 해상왕 장보고(본명 궁복 또는 궁파)와 그의 평생 동지인 정년이 이곳 선암마을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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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장보고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출신지가 ‘해도인’으로만 기록돼 있을 뿐인데 동네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취합하면, “예로부터 이들 두 사람 때문에 선암마을은 ‘무장골’로 불렸고 당시 덕진포는 완도까지 이어지는 해상의 통로로 장보고도 마을 앞 덕진포에서 배를 타고 완도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갔다. 마을 뒤편에 건덕암이 있는데 이 바위는 장보고의 모친이 7년간 기도해서 장보고를 태어나게 한 곳이었다. 또 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은 오봉산을 배 산으로 월출산을 마주보고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때 ‘마을 앞 바위에 배를 맺었다’ 하여 선암(船岩)이라고 하고, 마을 형국이 배와 같고 망루에 건덕바위, 국두암이 있어 선암(仙岩)이라고 지금까지도 부르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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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흥덕왕의 신임을 받아 청해진 대사로 임명된 이후에도 골품제에 젖은 신라 경주의 중앙귀족들은 ‘해도인’, ‘원악도인’이라고 경멸하며 그 당시 당·신라·일본의 삼각무역으로 동북아권 최고 거부에 무역상이였던 청해진 대사 장보고를 사정없이 멸시했다. 마치 김대중 문민정부를 깔아뭉갰던 형편없던 보수 골통들의 작태를 그 당시에도 여실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영호남 지역 차별의 원조가 바로 통일신라의 진골출신 귀족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요. 결국 장보고는 신무왕 김우징을 즉위시키고 그의 아들 문성왕에 의해 비참히 살해되는 비운의 장군이었다.
금정의 현 풍력발전단지인 둘레 1500미터, 높이 500미터의 ‘활성산’도 궁복이 쌓은 산성이라는 설이 있어 장보고의 호인 ‘궁복’과 비슷해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 박스 등 자료를 계속 추적해 왔으나 ‘목포대학교 유적탐구서’ 외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은 상태라 관련 자료가 너무도 취약했다.
다만 장보고가 기를 받았다는 오봉산은 백룡산이라고도 부르는 산세의 영향 때문인지? 금정면의 경우 문과합격자보다는 무과 급제자가 많았고, 수군절도사 최원립 장군과 충무공 이순신의 막료 정운 장군에 이어 여러 무장들과 조치덕 등 의병장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현세에도 해군 제독과 육군 장성에 이어 중견간부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다음으로 영암의 변천사는 전환기였던 고려 때까지 거슬러 고려 8대 왕 현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현종 ‘왕순’은 태조 왕건의 8아들인 왕욱과 경종의 4비였던 청상과부 효숙왕후 황보씨와 사통해서 출생했고, 어려서 아비를 잃은 채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음모와 살해 위협을 성종과 목종, 숭교사 주지 진관대사의 보호를 받아 이겨내고 마침내 ‘강조의 난’으로 많은 사연 끝에 왕위에 올라 21년을 다스렸다. 그는 고려의 행정제도인 군현을 정비했고 외성을 쌓아 국방도 튼튼히 했다. 불력으로 외적을 물리치고자 초조대장경 6천권도 간행했다.
영암은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이 깊다. 왕건의 선조들이 장보고와 연계된 무역의 선단을 구축했으며 훗날 후삼국이 각축하던 시절에는 고려 2대왕 혜종의 외할아버지 금성의 오다련과 구림의 최씨들이 은밀히 같은 해상 무역세력이였던 왕건을 도왔다.
도선국사, 진각국사, 최지몽 등이 고려의 건국에 참여했기에 영암은 보은 차원에서 우대되었고, 995년에는 영암에 전라도 서남해안의 군현을 다스리던 요즘으로 치면 광역시격인 낭주안남도호부(3품 도호부사: 지방 최고직)가 설치됐으며 영암군 관할에 장흥창을 지정, 세곡선을 운반했던 조운선을 띄우면서 영암은 그야말로 서남부 지방의 거점도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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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잘 나가던 영암이었지만 현종 9년 1018년에 행정제도인 군현제가 실시되면서 안남도호부는 고부를 거쳐 전주로 옮겨져 버렸다. 그 시절 안남도호부가 옮겨지기 전까지의 23년 동안이 영암 역사상 가장 흥청거렸던 전성기로 추정된다. 이후 현종은 거란의 3차 침입으로 나주까지 몽진했다. 잘 나가던 영암의 역사에 찬물을 끼얹은 자가 고려의 현종이다.
조선시대에 영암군은 ‘2영’이라 하여 영광군과 함께 군 단위에서는 가장 큰 군으로 도강군, 황원군, 곤미현, 해남현, 죽산현, 북제주를 속현으로 거느린 큰 고을이었으나, 1895년엔 나주부 영암군, 1896년엔 전라남도 영암군, 1906년엔 월경지 정비에 의해 강진, 해남 등의 일부 속현들이 점차 떼어져 나가고, 나주군이었던 금마면, 원정면, 세화면 등 일부가 영암군에 편입되면서 지역이 많이 축소되었다. 다시 1914년에 작은 면들을 통합, 오늘날의 행정구역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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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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