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천지 원수였던 가문들과 곤쟁이젓 이야기 - 심심풀이 우리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1년 03월 20일(토) 1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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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서로 이상과 취향도 같아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러 양가 부모님의 상견례까지 끝내고 마지막 관문으로 평생 한복 차림을 고집하며 향교의 전교까지 지낸 총각 측의 조부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손주며느리가 될 규수의 고향과 나이, 부모님의 함자까지는 무난히 패스했으나, 규수의 본관을 확인한 후 갑자기 안색이 바뀌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이 혼사는 절대로 안 된다고 극구반대해 결국 파혼되고 말았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반상의 신분질서가 무너진 지 130여 년이 지나 서구의 신문명과 자본주의가 도입되어 동성끼리의 혼인도 가능한 시절이지만, 결혼문화가 크게 바뀐 지금도 막상 결혼할 때는 사돈댁 가문을 꼼꼼히 따져보며 은근히 가문을 자랑하는 현상은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1392년 조선왕조가 세워지고 조선 초기의 왕들은 왕권을 강화하고 신하들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하들 간에 충성경쟁을 시키거나 교묘한 방법으로 상호 간 싸움을 부추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개인 간의 싸움이 문중 싸움으로까지 비화되며 서로 간에 철천지원수가 된 가문들도 나타났다. 18세기 후기에는 조상을 좋은 곳에 모시는 게 효도라며 명당을 먼저 차지하려는 풍수지리설의 산송문제로 송사가 끊임없이 이어져 나라에서까지 골머리를 앓았다. 일부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야사에 등장하는 가문 간 분쟁의 흔적들을 대충 살펴본다.
김부식의 경주김씨와 정지상의 서경정씨의 가문 간의 싸움이 첫 사례다. 1135년 고려 의종 때 사대주의 원조 경주 출신 김부식은 서경 출신 정지상과 서경천도론 문제로 논쟁이 거세지자 서경파들을 역모로 몰아 정지상의 가문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후 서경정씨들은 경주김씨들을 경계하였다. 훗날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은 아비의 권세를 믿고 아비뻘 되는 대장군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버렸으니 1170년 무신의 난이 발발하면서 경주김씨들은 그 대가를 단단히 치르게 되었다.
그다음 윤관의 파평윤씨와 심지원의 청송심씨 사이의 400년간의 산송문제는 근세까지도 회자되는 기막힌 사건이었다. 윤관 장군의 묘지 근처에 심지원의 묘지를 만들면서 윤씨들의 심기를 건들어 해마다 시제 때면 문중 간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라의 중신들이 나서서 두 가문의 화친을 거들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고 영조대왕의 중재마저도 실패로 돌아갔었다. 그리고 몇 년 전에야 양쪽 가문이 서로 양보해 종결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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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사례로는 윤증의 파평윤씨과 송시열의 은진송씨 간의 싸움이다. 발단은 윤증의 선친 ‘윤선거 묘갈명 사건’이었다. 두 집안은 모두 당대 기호지역(충청)을 대표하는 학자 집안이었고,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의 묘지명을 송시열에게 부탁하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송시열은 윤선거의 묘지명에 병자호란 당시의 행적을 비난하는 내용을 남겼다. 묘지명은 대개 고인에 대한 찬사로 채워진다는 것을 고려하자면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고 이에 윤증은 펄쩍 뛰며, 송시열에게 다시 써달라고 부탁했지만, 송시열은 이를 거절하였다.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요. 윤증의 아비 윤선거와 송시열은 절친이었는데 라이벌 관계였던 윤휴와 송시열이 북벌론과 학문의 견해 차이로 서로 다툴 때 윤선거가 윤휴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송시열은 앙금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 집안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사소한 개인 원한이 문중 싸움으로까지 번진, 치졸한 조선 사대부들의 진면목을 보여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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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의 반남박씨와 심온의 청송심씨 집안 간 싸움도 유명하다. 태종 이방원은 외척척결 정책에 반남박씨 박은을 내세워 세종 이도의 왕비 청송심씨 심온 가문을 도륙하였고 훗날 심온은 ‘반남박씨와는 혼인을 금하라’는 유언까지 남겼다고 전한다.
이발의 광산이씨와 정철의 연일정씨 집안 간의 원한은 극에 달해 근래까지도 광산이씨들은 연일정씨와의 혼사를 기피하며 시향 때는 정철을 3철이라며 저주했다고 한다. 1589년 기축옥사 때 추관이었던 정철은 동인의 영수 이발 형제와 팔순이 넘은 이발의 모친과 어린 아들까지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형을 집행해 무참히 죽였다.
우리 고장 영암의 김해김씨 사군파 학천군 이성현감 김극조도 이발 형제와 내통해 정여립의 역모에 가담했다는 광양현감 청주한씨 한덕수의 무고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해 장독으로 옥사하였다. 김극조가 광양현감에서 이성현감으로 부임하면서 후임으로 광양현감이 된 한덕수는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동인 이발 일당이 숙청당하자 서인에 아부하기 위해 “김극조도 이발과 더불어 난을 일으키기 위해 광양에 군대를 모아 조련한 사실이 있다”고 거짓 모함을 한 것이었다. 훗날 김극조의 아들 학성군 김완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한덕수를 화살로 저격한 일화는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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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조광조의 한양조씨와 남곤의 의령남씨 집안의 싸움에 얽힌 ‘곤쟁이젓의 유래’를 소개한다.
개혁의 아이콘 정암 조광조와 남곤은 같은 고향에 스승 김종직 문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한 고향의 선후배 사이였다. 둘 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도 잘 쓴 신동으로 사마시와 대과에 같이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남곤은 한창 후배인 조광조가 중종의 신임을 받아 자기보다 더 잘 나가자 이를 참지 못해 1519년(중종14) 심정, 홍경주, 중종의 후궁 경빈홍씨 등과 결탁해 ‘주초위왕’의 네 글자를 궁중의 나뭇잎에 새긴, 기기묘묘한 기묘사화를 일으켜 당시 집권세력으로서 개혁을 단행하려 한 조광조 등 신진사림파를 대거 숙청했다. 조광조는 39세의 한창나이에 화순에서 사약을 받아 비명에 갔고, 조광조의 친구 제주양씨 학포 양팽손은 목숨을 걸고 친구의 시신을 거두어 가매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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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곤은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되었지만, 남곤의 졸렬한 모습을 지켜본 조광조의 고향 사람들과 한양조씨들은 새우젓을 남곤과 심정의 이름을 따서 ‘곤쟁이젓’이라 부르며 남곤과 심정을 좀생이 간신이라 비난하고 저주하였다고 한다.
그 후 남곤은 죄를 자책하고, 화를 입을 것을 걱정하여 평생 써놓았던 글을 불태웠고 사림파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 역시 탄핵을 받아 1558년(명종13) 관작을 삭탈 당해 사약을 받고 비참하게 죽었으니 인과응보의 대가라 여겨진다.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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