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미국 학사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 하란사 선생

- 심심풀이 우리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1년 03월 28일(일) 18:37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 광주문인협회 이사

편집자 주: 지난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서거일이었다.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함께 최근 SNS상에서는 안중근 의사를 비롯 윤봉길, 유관순, 김구, 이회영, 나석주 등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조명하는 온라인 역사교육 캠페인이 일고 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월봉 김오준 선생께서 오래전에 보내주신 ‘조선 최초의 미국 학사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 하란사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게재해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 하란사 (본명 김란사) /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 유학 시절 [사진=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차제에 우리나라의 개화기 독립운동과 여성 계몽운동의 깃발을 높이 든, 뮤지컬로도 이미 소개되었던, 조선 최초의 여학사 출신 인텔리에 기미년 독립만세사건 유관순 열사의 스승 ‘하란사 선생’의 나라 사랑 정신과 의미 있는 삶들을 조명코자 한다.

선생의 본명은 김란사였으나, “나의 본래의 성은 김해 김씨. 이름은 란사입니다. 그러나 남편의 성을 따라 하란사라 부르기로 하였나이다”라며 개화기 여성으로 파격적이고 유별난 성격에다 사내들보다 더 굵직하고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채 짧은 나이에 조국광복을 위해 살다간 조선의 보기 드문 여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그녀의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1875년 평양 출신이며 아름다운 미모에 신체 조건이 뛰어났으며 성격도 활달하여 주위에 항상 사람이 따랐다고 한다. 출생신분이 예기라는 설도 있다. 그녀의 남편 하상기가 현재의 교도관인 인천 감리서 별감으로 상처를 당해 홀아비가 되자 어린 처녀의 몸으로 17살 연상에 1남 4녀를 둔 유부남의 후처를 과감히 택했다.

하란사의 내조로 남편은 차츰 승차해 생활에 여유도 갖게 되자 주부로서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개화의 물결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도 미래를 개척하여 선구자가 되리라. 그 길은 배워야만 한다.’
그녀의 머릿속은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이화학당에 들어가 공부해야 한다’고 결심한 후 애써 남편을 설득했다. 결국 남편은 그녀의 용기와 열정에 감동하게 되고 남편의 허락을 받은 그녀는 이화학당에 들어가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 했다.

▲ 이화학당 (편집자 주: 개신교 미션스쿨인 이화학당에는 금혼 학칙이 있었기에 하란사는 입학이 거절됐었다. 본래 금혼 학칙은 당시 어린 소녀들을 강제 조혼에서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오히려 이는 불합리한 교칙이 되었고, 2003년에 폐지되었다.)

마침내 이화 학당의 학생 중 중전인 명성황후의 영어 통역을 하여 세도를 잡아 보려고 스크랜턴 부인에게서 영어를 배운 벼슬아치의 소실과 기혼 여성들도 이화학당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사방등에 촛불을 켜 하인에게 들게 하고 이화학당 룰루 프라이 학당장을 찾아갔다. 신분을 밝힌 후 학당장과 마주 앉은 하란사는 들고 있던 등불을 훅 꺼 버렸다.
“아니, 왜 등불을 끄시오?”
학당장이 어리둥절해 묻자 하란사는 말했다.
“학당장님, 우리나라의 캄캄하기가 이 등불 꺼진 것과 같으니, 우리에게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간곡히 부탁한 끝에 그녀는 프라이 학당장으로부터 입학을 허가받았다. 프라이 학당장은 그녀가 암흑의 조선 땅에서 선각자가 될 자질이 충분히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화 학당 재학 중에 첫 딸도 낳았다. 남편도 벼슬이 승차했고 재력도 넉넉해 현실 감각이 예민한 아내를 최선을 다해 딸처럼 후원해 주었다. 남편과 가족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자신에게는 엄하고, 주위와 화목하며 매사 법도를 지켰다. 1896년 하란사는 평생 친구 박에스터와 함께 이화학당을 졸업했다.

▲ 일본 도쿄 경응의숙에서 유학한 조선 관비유학단 단체사진, 그리고 단체사진 속에 하상기, 하란사 부부가 보인다.

이화학당 졸업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터와 함께 미국유학을 계획했다. 미국 유학 준비를 위해 1년간 일본 경응의숙에서 영어를 공부했고, 드디어 꿈꾸던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감리교재단 오하이오주 웨슬리언 대학에 입학, 죽을 각오로 공부를 해 4년 만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미국 학사 학위생이 탄생한 것이다.

▲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기숙사 ‘모네트홀’에 앉아 있는 하란사. 벽면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다 [사진=이화여대 이화역사관]

하란사는 양장차림에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정동 예배당에 나타났다. 검정 모자에 새털 깃을 꽂고 검정 원피스를 입은 지적인 부인의 외모와 쿨한 매너는 장안에 화제를 뿌렸다. 능숙한 영어를 구사해 스크랜던 부인과 함께 예배당 건립에 힘을 기울였고, 영어반을 개설, 여성들에게 영어 교육도 실시하여 신 알버트, 손 메레, 양 우러더 등 많은 인재도 배출했다. 또 미국인 선교사 미스 알버슨과 함께 정동 이화 학당 옆에다 부인 성서 학원을 창설해 유부녀들의 성경 공부에도 힘썼다.

그녀는 자신을 이화 학당에 입학시켜 준, 프라이 학당장을 찾아 모교에 갔다. 이화 학당 교사 겸 기숙사의 초대 사감이 되었다. 영어 회화를 가장 능숙하게 할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한국인 교사로 학당의 교육을 총감독하는 교무부장 직책의 총교사가 되었다.

그녀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학생들간에 불려지고 있었다. 바로 ‘타이거 마더’였다. 엄격한 인상에 욕설을 잘 퍼부어 이화학당 학생치고 꾸중을 듣지 않은 학생이 없을 정도로 제자들을 훈육하였다. 공부를 잘하고 학교 규칙을 잘 지키며 품행 단정한 학생이 발견되면 자기 방으로 불러 수양딸을 삼아 친부모 이상의 애정을 쏟기도 했다.¹⁾
1) 편집자 주: 제자 중에는 유관순이 있으며, 유관순이 가담해 활동한 학생자치단체 이문회(以文會)를 이끌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미국을 내왕하는 일도 잦았다. 고국의 사정을 교포들에게 호소하여 후원금을 모아 오르간을 사서 모교에 기증하기도 했다. 서울 시내 아홉 개 교회를 돌아가며 주일 예배에 참석 1,426가정을 호별 방문하는 선교활동에도 힘썼다.

고종과 엄비의 국제정세와 외교문제 자문에도 응했으며 1910년 8윌 29일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자 독립운동에도 가담하였다. 1916년 미국 뉴욕에서 감리교 세계 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 대한독립을 세계에 호소했고, 미국의 교포들을 상대로 일본이 강제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버린 과정과 독립의 당위성을 가는 곳마다 유창한 영어로 연설했다.

▲ 하란사는 1916년 미국 뉴욕 사라토가에서 열린 세계감리교총회에 한국교회 평신도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다. 세계감리교총회 한국 대표 파견 기념사진으로 앞줄 왼쪽에서 5번째 서양식 복장을 입은 여성이 하란사이다. [사진=이원규 작가]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가 발표되자 세계 약소국가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자유를 부르짖으며 민족저항 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국내외의 애국지사들도 서로 연락을 취했고 하란사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고종도 거족적인 민족 저항 운동에 힘입어 의친왕 이강을 해외에 파견을 시도했다. 깊이 숨겨 두었던 한일 의정서 등 굴욕적인 외교 문서 원본과 외국 의원들에게 보낼 호소문을 준비해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 대한제국의 억울한 입장을 호소하려 계획했다. 그 중요한 임무에 하란사가 발탁되어 은밀히 추진되었다. 미국 유학 당시부터 의친왕과 하란사가 교분이 있었기에 고종은 그녀를 믿고 패물을 군자금으로 주어 일을 착수시켰다.
“이번 일을 성사시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그녀의 가슴은 한없이 뛰었다.

그러나 1919년 1월 하순, 고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했다. 일제에 의해 독살당한 고종의 죽음으로 허탈감속에 하란사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결심으로 북경으로 떠났다. 2월 중순, 동경 유학생 대표 황에스터는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여성 대표로 하란사를 출국시키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서울에 왔으나 하란사가 이미 북경으로 떠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북경에 도착한 하란사를 중국의 교포들은 열열히 환영했다. 교포들이 개최하는 환영 만찬회에도 수차례 참석 우리민족의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당시 일제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감시했다. 불행히도 만찬회에서 먹은 음식이 빌미가 되어 하란사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결국 북경에서 숨지고 말았다. 그녀의 시체는 시커먼 색으로 변질되어 독살의 의혹을 짙게 했다. 하란사의 남편 하상기도 북경을 다녀와서 아내가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친일파에게 독살당했다고 단정하며 분노했다. 이등박문의 양녀이자 일제의 스파이요. 희대의 요부 배정자가 하란사의 뒤를 미행해 독살시켰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44세 한창의 나이에 조국광복을 위해 그토록 자신을 헌신하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갔다.

▲ 하란사가 중국 북경에서 사망한 사실을 담은 주일본공사관 보고서 [사진=이화여대 이화역사관]

해방이 되고도 이승만 정부는 고종과 의친왕이 연계된, 하란사의 독립운동의 사실을 부각하지 않았으며 영친왕 이구의 귀국까지도 방해한 옹졸함과 무례를 저질렀다. 그녀가 비명에 간 지 76년이 지난 1995년 김영삼 정부는 비로소 하란사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²⁾
2) 편집자 주: 2018년 4월 4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위패가 봉안됐다.


짧은 생애의 하란사 선생! 평생을 대담무쌍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험난한 길을 고집하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아름답게 살다간 참으로 자랑스러운 대한의 여성이었다.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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