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씨와 족보 이야기

심심풀이 우리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1년 04월 19일(월) 02:53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 광주문인협회 이사
‘천성만본’이라는 옛말 따라 현재 우리나라는 280여개의 성과 본관에 따른 5582여개의 씨가 있다. 외국인들의 귀화로 성씨는 늘어나는 추세다.

▎성씨의 역사

성씨의 역사는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하는데 삼국시대의 최전성기 고구려의 장수왕, 백제의 근초고왕, 신라의 진흥왕때부터 시작된다. 고구려에 10개, 백제는 8개, 신라는 9개의 성씨가 등장한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호족들에게 성을 하사해 성씨가 늘어났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영향으로 반상의 차가 극심해 양반이 아니면 성씨를 가질 수 없었다. 성씨를 관리키 위해 왕실에선 ‘선원록’과 ‘유부록’을, 가문에서는 ‘족보’나 ‘보첩’, ‘대동보’를 만들어 문중에서 엄격히 관리했다.

▲ 『선원록』은 왕실 족보로 국가에서 관리하는 왕의 친인척에 관한 인적 사항을 조사하여 기록한 것이다. 다만 이 책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시조인 이한(李翰)부터 조선의 세 번째 임금인 태종의 직계만을 수록하고 있다. [사진=국립고궁박물관]

동학혁명과 1896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고 왜놈들이 을사늑약을 체결, 1909년 3월 4일 세수 확대와 장병 징발을 목적으로 ‘민적정리령’을 강제로 시행하면서 누구나 성씨를 갖게 되었다. 지금의 면사무소가 아닌, 경찰관서 분주소에서 등록하게 하면서 민적등록을 하지 않는 자에게는 벌금을 물리고 그래도 하지 않는 자는 곤장 10대를 때려 강행했다. 소위 노비나 상놈 등 천민계급도 그제야 부랴부랴 주인 성씨나 지방세력가의 성씨로 등재했다. 그래서 김, 이, 박의 성씨는 기하학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1592년 조일전쟁(임진왜란)과 1636년 조청전쟁(병자호란) 후 궁핍한 나라 재정을 메꾸기 위해 ‘공명첩’을 수십만장 팔아 가짜 양반을 대량 양산했고 가짜 양반들은 족보까지 위조해 성씨를 획득했다.

▎족보의 등장과 변천

족보는 한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알기 쉽게 부계 중심으로 정리한 도표 형식의 책으로, 가문의 단합과 조상 공경이라는 유교적 가족관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족보의 시초는 중국의 제왕연표라는 황족의 혈통 표기에서 시작되었다. 개인이 족보를 갖게 된 것은 한나라 때 현량과 제도를 통한 인재 선발에서 응시생의 가문 내력을 확인하기 위해 시작됐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답안에 적용했던 사조단자와 흡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동성동본의 혈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족보의 등장은 15세기부터다. 현재 규장각에 보관된 안동 권씨 성화보와 문화 류씨 가정보를 첫째로 꼽는다.

성화보는 조선 성종 7년(1476)에 간행된 족보인데 명나라 헌종의 연호인 성화(成化) 12년에 간행되어 ‘성화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족보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중간본만 전해진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처음 간행된 족보는 문화 류씨의 가정보란 기록이 있다. 가정(嘉靖)은 명나라 황제의 연호로 이때 간행되어 ‘가정보’라 칭했다. 서문에는 가정보가 발간되기 140년 전 명나라 영락(永樂)때인 조선 세종 때에 이미 문화 류씨의 족보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영락보는 전하지 아니하고 가정보만 남아 있다.

가정보는 완벽한 체계를 갖추어 외손까지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그 후 족보를 만드는데 모델이 되었다 한다. 파평 윤씨도 기해보를 간행했다.

▲ 안동 권씨 성화보의 서문 [사진=규장각]

족보가 일반화되기는 조선 선조 이후 당쟁이 가열되어 문벌간 대결 양상을 띠게 되면서 가문의 유대를 공고히 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후부터다. 문벌의 결속을 도모하는 방편의 하나가 족보였다.

족보의 변천은 조선 초기에는 아들과 딸이 모두 족보에 기재가 되고 순서도 출생일 순으로 기록했던 것을 볼 수 있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딸은 거의 기재가 되지 않았다. 출생일 순이 아니라 아들이 앞에 오고 딸이 뒤에 기재되는 형태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족보를 사고팔거나 위조한 경우도 많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양반 내에서도 계급이 분화되어, 한양에 모여 살면서 관직을 독점하는 ‘권반’과 향촌에 머물며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어 살던 양반 사족인 ‘향반’ 그리고 권력도 경제력도 없이 도태된 ‘잔반’이 생겨난다. 잔반들은 암울한 경제 사정을 타파하기 위해 부농층이나 상인에게 족보를 팔았고 이들은 족보를 사서 다른 고을로 이사한 후 양반 행세를 하였다. 돈을 주고 양반가에 양자로 가기도 했다.

족보가 이런 식으로 위조되어 상민들에게 들어갔고 양반이란 지위는 상민들에게 가혹한 군역을 면제받게 해주는 중요한 것이요. 족보가 그 매개체였다. 조선 후기 양반이 늘어나 세수가 줄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두는 호포제를 실시했다.

▎성씨와 신분

원래 ​성씨는 황제나 임금이 귀화인과 공신들에게 하사한 것으로 출생지명을 따라 이름을 붙였다. ​​조선 초기에는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왕족과 권문세가 등에 국한되어 그 수는 매우 적었다. ​​고려왕조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고려 왕족의 성씨 왕(王)씨 일족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득세했던 ​권문세족들을 대거 숙청했기 때문에 ​​성씨가 상당수 사멸하게 된다. 왕(王)씨는 살아남기 위해 ​획을 더 추가해서 ​옥(玉)씨, 전(全)씨 등으로 고치는 경우 외에 아예 성을 쓰지 않았다.

조선 초 태종 때는 조정 대신 중에서도 ​성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15세기 후반 성종 때 ​문서에 기록된 자질금, 말동, 합이, 자근, 철근 등의 이름이 나오는데 ​모두 한자 이름이지만 성이 없었다.

​불과 100여년 전 ​1912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우리나라를 방문한 선교사 엘리제 셰핑 여사는 ​호남지방을 순회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500명 중 ​이름이 있었던 사람은 단지 10명뿐이었다. ​여인들은 돼지 할머니, 큰 년, 작은 년, 언년​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삼국시대인 고구려는 해(解)·을(乙)·예(禮)·송(松)·목(穆)·우(于)·주(周)·마(馬)·손(孫)·창(倉)·동(董)·예(芮)·연(淵)·명림(明臨)·을지(乙支) 등 ​성씨가 총 10여 종에 불과했고, 백제는 사(沙)·연(燕)·협(劦)·해(解)·진(眞)·국(國)·목(木)·백(苩) 등의 ​8개 성씨가 존재했으며, ​신라는 6부 촌장 출신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 씨에 ​박(朴)·석(昔)·김(金)의 왕족 성씨가 있었다.

​참고로 김씨는 6세기 중엽 진흥왕의 이름을 ‘금진흥’이라고 썼지만, 조선왕조에서 ‘음양오행상 금이 목을 해친다’고 금을 김이라 억지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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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조선시대에 상인, 공인, 백정 등 천민들은 족보가 없어 양반들이 천민을 살해해도 처벌받지 않았다. 양반들에게 노비는 하나의 생명체가 아닌, 재산에 불과했다.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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