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과 영암의 지명 유래

심심풀이 우리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1년 04월 26일(월) 14:53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 광주문인협회 이사
우리 고장 영암의 지명에 대한 문헌이나 자료가 너무도 척박해 아쉬움 속에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전전긍긍했다. 마침 한동네에서 살았던 서울대 출신으로 한국지리학회 회장을 역임한 후 우리지명뿌리알기 연구회 회장으로 지금도 왕성히 활동하시는 석학 조강봉 교수님을 뵐 때마다 영암에 대한 자료를 부탁드렸었는데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편찬하신, ‘한국지명의 어원 연구’란 귀한 책을 선물로 보내 주셨다.

물론 여러가지의 설이 있겠으나 지리학자의 입장에서 살펴본 월출산과 영암의 지명에 대한 교수님의 견해를 정리해 소개코자 한다.

영암군은 본래 백제의 ‘월나군(月奈郡)’을 신라 경덕왕이 개칭한 중국 한자식의 지명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36권 지리3’에 ‘<영암군>, 본<백제><월나군>, <경덕왕>개명, 금인지.’라 쓰여있다.¹⁾
1) 편집자 주: <靈巖郡>, 本<百濟><月奈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영암군은 원래 백제의 월나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양주동 박사는 “영암의 ‘영’은 백제 고훈(古訓)인 ‘돌’인듯한데 영암-월나-마령현-마돌현이 있다”라고 하며 월나나 월출은 이와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언급했다.

국어학자 충남대 도수희 박사도 “월출산의 옛 지명 월나악(月奈岳)은 산 전체가 기묘하게 솟아 나온 신비스러운 돌산이기 때문에 ‘돌’에서 그 뿌리를 연 지명이다”라고 했다.

월출산은 신라 때는 ‘월나산(月奈山)’으로 불렀고, 고려 초기에는 ‘월생산(月生山)’으로 불렀다. 조선 성종 때 노사신이 편찬한 ‘동국여지승람 35권’에서는 ‘월출산은 속설에 기암괴석의 외화개산(外華蓋山)으로 작은 금강산이요. 조계산(曹溪山)이라 칭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월출산은 한자의 뜻에 따라 우리는 익히 아는 대로 ‘달이 뜨는 산’에서 그 유래를 찾고 있다. 아마도 옛날 우리 조상들은 밤이면 달빛에 의지해 생활했고 자연스레 하늘을 쳐다보며 달과 별을 벗 삼아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것이다.

생육신이며 천재 시인이요. 기인으로 새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매월당 김시습도 달빛 적신 월출산의 풍경에 반하여 찬탄의 시를 읊었던 남도의 아름다운 명산이기도 하다.²⁾
2) 편집자 주: 사견이지만 최근 연구 글들을 토대로 살펴보면 월(月)을 달보다는 돌(石)과 연결할 경우 개념과 내용이 명확해 보인다. 월출산을 그대로 풀어 쓰면 ‘달이 나온 산’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여기서 왜 달이 나왔을까에 대해 의문이 생기지만 돌, 암벽 바위가 나온 산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쉬워진다. 월출산의 돌, 특히 암벽 바위가 국내 여느 산 못지않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알타이 고어나 고구려어에서 ‘달’은 ‘높다’나 ‘산’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돌(石)과 그 어원을 같이한다고 한다. 우리 말 ‘달’을 사용하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月’로 바뀐 게 아니냐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월출산은 달출산, 달산 혹은 돌출산, 돌산 등으로 불리다가 월출산으로 정착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더욱 논리적으로 보인다.

[사진=박철 작가]

영암의 첫 글자인 ‘영’의 유래를 추적해 보면, ‘동국여지승람 36권 영암군 산천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엿보인다.

‘동석(動石)은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다. 특히 층암 위에 서 있는 세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그 무게는 비록 천 백인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암(靈巖)이라 칭하고 군명도 여기에서 나왔다.’라며 월출산의 신령스러운 흔들바위에 기인해 영암의 지명이 택했음을 밝혀주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은 국론을 통일하고 나라를 일신시키기 위해서 추진한 한화정책에 따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제각각 지명들을 중국식 2자 지명으로 개칭하려 했었고 거기에 기인해 영암이란 고을 명이 되었던 것 같다.

영암은 고려 태조 왕건과도 관련이 깊다. 왕건의 조상들이 장보고와 연계된 해상무역의 선단을 함께 구축했으며 후삼국이 각축하던 시절에는 고려 2대왕 혜종의 외조부 금성의 오다련과 구림의 최씨들은 은밀히 같은 해상 무역세력 왕건을 도왔다.

도선국사, 진각국사, 최지몽 등이 고려의 건국에 참여해 보은 차원에서 우대되었고, 995년에는 영암에 전라도 서남해안의 군현을 다스리던 요즘으로 치면 광역시 격인 낭주안남도호부(3품 도호부사)가 설치됐으며 영암군 관할에 장흥창을 지정, 세곡선을 운반한 조운선을 띄워 영암은 서남부 지방의 거점도시가 됐다.

잘 나가던 영암이 현종 9년 1018년 행정제도인 군현제가 실시되면서 안남도호부는 전북 고부를 거쳐 전주로 옮겨져 버렸다. 영암 역사상 고려 초기 23년 동안이 영암의 최전성기로 추정된다.

그 후 조선시대에 영암은 ‘2영’이라 하여 영광과 함께 군 단위에서는 가장 큰 군으로 도강군, 황원군, 곤미현, 해남현, 죽산현, 북제주를 속현으로 거느린 큰 고을이었으나, 1895년 나주부 영암군, 1896년 전라남도 영암군, 1906년 월경지 정비에 의해 강진, 해남의 일부 속현들이 점차 떼어져 나가고, 나주군이었던 금마면, 원정면, 세화면 등 일부가 영암군에 편입되면서 지역이 많이 축소되었다. 다시 1914년 작은 면들을 통합, 오늘날의 행정구역을 갖게 되었다.

[사진=영암군청]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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