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사봉의 혼 의병장 강무경과 양방매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심심풀이 우리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1년 05월 10일(월) 00: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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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강무경은 무주 설천 출신으로 금정 국사봉을 본부로 정한 호남의소 총대장 심남일 휘하의 가장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선봉장으로 국사봉 접경지에서 23회의 전투를 치른, 나주출신 중군장 박사화 의병장과 함께 심남일 장군이 가장 신임한 의병장이시다.
일찍이 한학을 배우고 뜻한 바가 있어 필묵장사를 하면서 전국을 순회하다 마침내 7살 연상의 함평출신 의병장 심남일을 만나 의형제를 맺은 후 1908년 3월 7일 강진 옴천의 오치전투, 4월 15일 장흥의 곽암, 6월 19일 남평 장담원, 6월 25일 능주 노구동, 7월 30일 영암 사촌, 8월 1일 나주 반치, 9월 20일 장흥 신풍, 10월 9일 해남 성내 등 곳곳에서 일본군과의 접전으로 대승을 거두어 그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선봉장인 강무경은 연일 계속된 전투의 여독으로 병이 들어 1908년 9월 20일 부하인 양성일 의병의 금정 분토동 초가에 눕게 되었다. 양성일은 선비 양덕관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의병에 자원한 양방매의 친오빠로 집에서나 전쟁터에서도 끝까지 누이동생 양방매를 지켜준 수호천사였다.
한말 최초의 여성의병 양방매는 1890년 영암군 금정면 청룡리 분토동에서 선비 양덕관의 4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고루한 선비 집안 가풍의 영향으로 성품이 곧고 말수가 적었던 것 같다.
양방매와 강무경의 첫 인연은 1908년 7월 30일에 있었던 사촌(금정면 청룡리 동산) 전투가 그 계기다. 여름도 한풀 꺾인 7월 그믐, 산하의 나무들이 고운 색깔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고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소슬한 바람이 가을을 느끼게 했다. 나주 다도면 판촌마을에 주둔하며 노두구전투를 마치고 다음 항쟁을 위해 영암으로 행군하여 사촌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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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어두워질 무렵, 일본 헌병대장 금평산이 기병 20기를 거느리고 온다는 연락을 받은 의병장 강무경은 의병들을 사촌마을 돌담에다 매복시켜 놓은 다음, 후군에게 포를 터트리며 적을 일제히 공격하여 적장 금평산과 기병 10여명을 사살했고 적군의 무기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승전의 기쁨속에 가까운 양덕관 선비의 집에서 강무경은 유숙을 하게 되어 30살 강무경과 18살 양방매가 처음 만났다.
1908년 9월 20일, 장흥 유치 신풍에서 전투를 마친 강무경은 피곤이 엄습해 오면서 온몸에 열이 나고 떨림을 이기지 못해 신변보호가 안전한 분토의 양 선비집을 찾아 몸져눕게 되었다. 몇 달 전 알게 된 30대의 건장한 청년 의병장 강무경을 마음속으로 연모하던 터라 강 의병장을 정성스레 간병하였고 결국 서로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이 사실을 눈치챈 아버지 양 선비와 오빠 양성일은 남녀가 유별한 시절이라 소문이 두려워 두 사람의 혼례를 부랴부랴 서둘러 이틀 만에 혼례를 올리게 하였으니 그때가 1908년 9월 22일이다.
신혼의 단꿈도 순식간, 지극정성의 간병으로 5개월 만에 몸을 추스른 강무경 의병장은 전장에 출전하려 집을 나서야 했다. 따라나서는 양방매에게 강무경은 ‘여자가 나설 데가 아니다’며 적극 말렸으나 나라 위해 목숨 바치려는 남편에게 언제 어떤 일이 있을줄 모르니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라는 단호한 결단 끝에 구국항쟁의 길로 함께 나섰다.
이리하여 1909년 3월 8일 강무경 의병부대는 남평 월교리에 머물다가 일본군 20여명이 운곡으로 갔다는 보고를 받고 작전계획을 세운 다음 본진을 장암에 두고 본진을 5개 부대로 나눈 후 대치. 대항봉. 월임치. 덕룡산, 병암치 등에 매복시켜 놓고 유인작전으로 협공을 벌여 일본군 100여 명과 경관 등을 사살하고 70여 명을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날 의병장 강무경의 아내 양방매도 홍일점 의병으로서 첫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니 그가 곧 우리나라 의병사상첫 여성의병이 된 것이다. 이 전투를 남평의 거성동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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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1일에는 장흥 유치 한대리에다 본진을 두고 바람재 바위굴에 잠복하고 있을 때 거성동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인근 12개 고을 수비대 병력 400여 명을 이끌고 의병토벌작전을 전개해 왔다. 선봉장 강무경의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응전하여 적 100여 명을 사살하고 격퇴함으로써 의병대의 사기는 높아만 갔다.
그 후 4월 2일 보성 웅치작전에서 적 8명을 사살함과 동시에 대포 2문 등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고 5월 12일 보성 천동에서도 적 5명을 사살하고 격퇴하는 등 무수한 전과를 올렸는가 하면 홍일점 의병 양방매도 남편부대의 일원으로서 장흥, 보성, 강진, 해남, 광양 등지까지 전라남도 동남부 일대의 산악지방을 무대로 유격전에 참가해 공적을 남겼다.
하지만 1909년 7월 청천벽력같은 순종의 ‘의병해산령’의 칙령이 떨어졌다. 국사봉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호남의소 심남일 의병부대는 7월 21일 청룡리 고인동에서 피눈물로 의병을 해산하였다. 총대장 심남일은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읊었다.
‘가을바람 쓸쓸한데 서로 울며 이별할 제
고인산 앞에서 말도 가기를 싫어하네.
왜적들을 소탕할 날 꼭 오고야 말 것이니
3년 동안 사생동고(死生同苦) 결코, 헛되지 않으리.’
해산 후에도 영암의병의 활동은 이어졌고 1909년 9월 5일 금정출신 의병장 조치덕 부대는 의병 44명을 거느리고 금정면 이암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수비대장 남본 대위와 십여 명을 사살하고 장렬히 전사했다. 심남일, 강무경, 양방매는 화순 능주 풍치 바윗골에서 체포되었다. 그때가 1909년 10월 9일이다. 일제는 심남일, 강무경 의병장을 체포한 후 일본군 토벌대를 해체했으니 한말 의병사에서 이들의 위치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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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남일과 강무경, 양방매는 광주경찰서로 이송 후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양방매는 나이가 어린 데다 평소 말수가 적은 게 습관이 되어 심문할 때 묵비권을 행사해 벙어리로 간주해 훈방되었으나 남편 강무경은 1910년 7월 23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으니 그의 나이 32세요. 양방매는 20세였다.
남편을 잃은 청상과부 양방매는 친정으로 돌아와 전사한 오빠 양성일의 아들인 조카를 키우면서 국사봉 일원을 누비며 남편의 영혼을 달래는 일이 주 일과였으며 약초캐기와 품팔이로 연명해야 했다. 양방매는 남의 집 품팔이를 가서 새참이나 식사할 때는 꼭 자기의 몽당수저를 품속에 지니고 다니면서 그 수저만으로 식사했으며 일체 남정네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 1962년 3월 강무경 의병장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한 후 1973년 10월에는 국립묘지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양방매는 그녀의 나이 94세인 1984년 6월 6일 꼬박 70년 만에서야 남편의 묘역을 눈물로 참배했다. 그리고 2년 후 1986년 9월에 96세로 한 많은 삶을 마감하셨다.
나라에서는 1995년에서야 국립묘지 현충원의 강무경 의병장과 합장을 해주었고 2005년 영암 덕진 출신 향토사학자 신희범 어르신의 각고의 노력에 힘입어 한말 최초의 여성의병으로 그 공이 인정되어 대한민국 건국포상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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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