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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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1년 05월 16일(일) 01:47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 광주문인협회 이사

암행어사는 조선시대 왕의 측근 중에서 정3품 통훈대부, 절충장군 이하의 관원을 지방 고을에 비밀리에 파견. 왕을 대신해 암행감찰의 임무를 띤 특명사신이다. 고을수령과 지방 토호의 정치 득실(得失),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탐문해 왕에게 사실대로 아뢰는 것이 직무였다.

수의(繡衣) 또는 직지(直指)라고도 불리는 행대어사, 분견어사, 별견어사, 암행어사 등 그 이름도 십여 개가 넘는다. 이 어사들은 조정에서 파견된 중앙 관료로서 이조(吏曹)나 국왕이 임명하고 임명 절차, 임무 수행, 옷차림과 거동, 신분의 노출 정도 등에 따라 각각 구별되었다.

어사 파견의 전례는 고려조 무인 정권 때부터 등장한다. 사헌부의 당하 관원을 행대감찰로 임명해 지방에 파견 염문규찰, 잠행체찰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 『고려사』의 사헌부 설치 기록

어사의 파견 목적도 시대에 따라 각각 달랐다. 1392년(태조 1) 의주 등 국경지역의 불법적인 월강무역을 금지시키기 위해 조선시대 최초로 행대어사를 파견했다. 이들의 주요임무는 건국초기라서 민심회유를 위해 수령 등 지방관과 경차관 및 토호, 향리 등 지방세력의 불법탐학을 규찰하는 것이었다.

태조∼태종 때는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정비하던 시기로, 파견된 행대어사는 수령보다 토호를 대상으로 토착세력의 불법을 집중적으로 규찰하였다.

그후 세종∼단종 때는 부민고소금지법의 시행과 더불어 수령의 권한이 확대되고 집권체제가 정비되면서 수령의 무능과 비리를 적발하는 수령의 불법 규찰이 주가 되었다.

세조∼성종 때에는 행대어사의 품계가 수령과 같은 6품이어서 품계가 높은 불법 수령을 엄단할 수 없는 한계가 노출되어 5품 이상의 관료에게 대관직을 겸임시켜 3품 이하의 관리까지 직단권을 발휘할 수 있는, 어사의 권한이 강화된 분견어사제를 시행해 수령규찰의 임무를 전담시켰다.

성종 때 청백리 조지서는 왕의 측근으로 정5품 응교직에 있었는데, 그 직을 가진 채 분견된 관원 중의 한 사람으로 그의 활동과 관련해 1490년(성종 21) 1월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조지서가 어사가 되어 항상 번개와 같이 관부에 출입함이 들에 사는 매와 같으며, 순찰할 때는 복색이 무상해 혹은 관복하고 혹은 미복해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알 수 없다고 하더라’고 하였다.

중종 때 한산군 이손 등 6명을 8도의 촌향에 최초로 암행어사를 파견, 백성의 질고를 살피고 고을에서의 대접을 거절하고 말린 밥을 휴대해 힘써 번거로움과 폐 끼치는 것을 덜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분견어사제에서 더 나아간 암행어사제로 전환되었음이 확인된다.

분견어사들의 신분이 노출되어 권력층에 매수되거나 반대 세력들에게 살해되어 한양으로 귀환율이 낮아 왕이 직접 선정하여 비밀리에 임명. 파견하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서인 노론세력의 일당체제로 중앙정치세력과 지방수령들의 결탁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짐에 따라 암행어사는 백성들의 구원자요. 희망이었다.

영·정조 때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가 암행어사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찬 어사들의 전성시대가 되었으며 영·정조가 도성밖을 나서면 격쟁이라 불리는 민원을 직소하는 건수도 수천 건에 달했다.

어사의 파견 절차는 의정부의 공론화를 거쳐 3의정이 대상자를 뽑는 초계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왕이 윤허하는 합인의 단계가 필요했다.

합인 후 전국 360군현의 이름을 기입한 참댓가지가 들어 있는 죽통에서 암행시찰할 대상군현을 뽑아 추첨으로 결정하는데, 이를 추생이라 불렀다.

어사가합인은 어전에서 왕으로부터 추생한 군현의 이름이 기입된 봉서를 지급받고, 승정원에서 어사사목 한 권, 마패 한 개, 유척 두 개를 지급받고 퇴궐한다.


봉서는 어사 임명장이나 다름없는데, 표면에 ‘남대문을 나간 뒤에 열어봄’ 또는 ‘동대문을 나간 뒤에 열어봄’이라고 써 있었다. 어사는 이를 지정된 대문 밖에 나가 비로소 열어보고 임무를 확인한 뒤 목적지로 직행하였다.

마패는 역마 사용권을 부여하는 증패로 1마패에서부터 5마패까지 5종이 있었는데, 암행어사에게는 보통 2마패가 지급되었다. 마패의 소지는 봉명사신임을 입증하는 것이므로 권력의 상징이었고, 어사의 봉고나 처분문서에 마패를 날인해 직인으로 대용하였다. 유척은 일종의 자로서, 형구의 남발 여부를 검열하는 데 사용하였다.

어사는 명령을 받은 바로 즉일 출발이 원칙이었다. 역마를 타고 한두 명의 호위무사나 시종을 데리고 목적지로 향하였다.

관내에 들어가면 수령의 탐학과 가렴주구를 탐지하기 위해 남루한 옷과 찢어진 삿갓으로 변장하고, 풍찬노숙 염문정찰하였다.

어사가 염찰을 마치고 추생군현의 고을에 들어가 수령의 관가에서 관가의 문을 열고 자리에 앉는 것을 ‘출도’라고 불렀다.

출도의 방법은 관가의 삼문을 역졸과 대리가 두드리면서 큰 소리로 ‘암행어사 출도야’를 외친다.

어사는 동헌으로 행차해 수령과 이속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대청에 착석 개좌한다. 공문서를 검열하며 관가창고도 점검한다.

불법문서가 포착되면 수령의 관인과 병부를 압수하고 창고에 ‘封庫’ 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해 봉한다.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하여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재심해 풀어주고 죄가 결정되지 않아 오랫동안 감금된 죄수도 석방한다.

그리고 양민을 괴롭히는 관리를 적발하면 긴급체포영장을 발급, 체포구금하고 처벌한다. 또한 억울한 백성들의 민원을 탐지해 접수하고 판결처분을 문서로 발행해 원한을 풀어주기도 한다.

▲ 자료사진 (편집자 주: 위 사진은 암행어사가 마패를 인장처럼 사용했는데, 집안의 송사를 판결하면서 여러 번 마패로 직인을 찍었다. 이것의 내용은 어떤 집안에 조선시대의 음서제도에 의한 벼슬을 내리는 것에 관해 그 집안의 장손이 자신이 받아야 된다는 송사를 하자 암행어사가 이 벼슬은 장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칭송하고 나라에 공이 많은 차남의 집에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판결을 적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패를 직인으로 사용했다.)

어사가 소임을 마치고 귀환하면 서계(보고서)와 별단(부속문서)을 각 한 통씩 작성해 왕에게 복명하는 날에 제출한다.

서계는 수계라고도 불렀으며 생읍시찰에 관한 특별지시사항, 봉서에 지시된 특별사항 등을 채록·탐문해 서한형식으로 조목조목 기술하였다.

별단은 서계에 미진한 사항, 시찰사항, 어사재거사목에 규정된 일반적인 폐정사항에 대한 개선책을 담은 의견서로서, 어사 자신의 교양과 정치적 식견을 개진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서계는 필수적 복명요건이지만 별단은 임의사항이었다.

하지만 영조와 정조대에는 서계와 별단의 내용 여하로 어사의 인물이 평가되었으며, 출세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어사가 귀환하고도 장기간 서계를 제출하지 않거나 서계를 대필시킨 것이 알려지면 처벌하였다.

암행어사는 선발과정에서 의정부 대신들과 상의 없이 임금 혼자서 어사를 결정, 초계ㅡ합인ㅡ추생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직파하는 어사였다. 암행어사는 어사의 이름도 직책도 직무도 파견자인 왕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이 때문에 어사 박문수가 암행어사가 아닌, 신분이 노출된 별견어사였다는 주장도 있다.

암행어사 중 이름난 어사는, 소론임에도 영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아 28년간 암행어사를 지낸 박문수, 정조의 분신 다산 정약용, 고종 때의 조선최연소 대과합격자 이건창이 있다.

조선 최초의 암행어사는 중종대의 이손이며, 1892년 고종 29년 삼정의 문란으로 전라도에 파견된 암행어사 이면상을 끝으로 암행어사 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어사 박문수 영정사진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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