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십조’ 왜곡의 그 진실

심심풀이 우리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1년 05월 30일(일) 09:42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 광주문인협회 이사

식민사관의 대표적 주구인 이병도는 대일항쟁기 때 조선사편수회·청구학회회원으로 그의 스승인 경성제대 교수 이마니사 료의 조교로 식민사관을 정립한 친일 매국노다. 서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식민사관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승해 소위 강단 사학의 주체들로 키워내 진보사관과 대립각을 세운 채, 역사논쟁을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다. 놀랍게도 이병도의 손자들은 16명이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의 ‘황국사관’을 계승한 이병도의 ‘식민사관’과 중국의 ‘동북공정론’(총책, 중국사회과학원 주임교수 담기양)은 일란성쌍둥이 사관으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감추고 다른 나라들의 침투사를 강조하며 무장투쟁사를 말살하고 고구려의 존재를 축소시키며 한사군의 존재를 부각시켰으며 김부식의 삼국사기 초기 부분을 부정. 삼국시대 중 4-6c를 일본의 ‘임나본부설’을 적용(신공황후설)했고 대일항쟁기의 무장독립투쟁 내용을 역사책에 게재하는 것을 엄금했다. 또한 우리 조상인 ‘치우천황시대’와 우리 문화인 ‘홍산문화’(거란, 여진, 말갈도 우리 민족이었다는 설)를 말살했으며 ‘북벌론’을 허위기재(윤휴를 송시열로 둔갑)하고 대종교 말살로 소중화 사상을 억누르고 사대주의를 부각하는 등 왜와 중국은 지금도 우리의 정체성을 꾸준히 왜곡하고 있으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호남차별의 단초인 ‘훈효십조’를 완전히 왜곡한 것이 분통 터진다.

호남차별의 역사적 이유를 말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훈요십조’는 고려 태조 왕건이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몸소 지은 열 가지 유훈으로 10조 중 제8조는 지금까지 호남차별 논리로 이용돼왔다. 일제시대 식민사학자들이 그 해석을 제멋대로 왜곡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지역갈등의 원천으로 작용 호남인들을 비하해 왔다.

훈효십조는,
1. 우리나라의 대업은 부처님 덕분이니, 교선의 사원을 창건하도록 하라.
2. 모든 사원은 다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가려서 개창한 것이니, 함부로 사원을 지어 지덕을 손상시키지 말라.
3. 왕위 계승은 적자·적손을 원칙으로 할 것.
4.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본받지 말 것.
5.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니 100일간 그곳에서 머물라.
6. 연등·팔관회의 주신은 가감하지 말 것.
7. 소인을 멀리하고, 현인과 친하며, 조세를 가볍게 하고, 상벌을 공평히 할 것
8. 차현이남 공주강외 인물을 등용하지 말 것,
9. 관리의 녹봉은 그 직무에 따라 제정할 것.
10. 경사를 널리 읽어 고인의 말을 거울삼을 것이다.

문제는 ‘훈요십조 8항’의 ‘車峴以南, 公州江外’를 해석하면 차현고개 아래와 공주 고을을 감싸고 흐르는 공주강 바깥쪽 사이의 지역을 말함이니 지금의 청주지방이다. 궁예는 변란을 피해 차현고개 인근의 칠장사에서 유아 때부터 10세까지 살았다. 그런 연유로 청주지방 일대는 궁예의 고향으로서 정치적 기반이 되었으며 궁예가 청주 출신 사람들을 각별히 신임하여 중용하였고 왕권강화를 위해 청주사람들을 철원으로 이주시켜 왕조의 기반으로 삼았다. 따라서 궁예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궁예의 고향이자 왕조의 기반이었던 청주지방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궁예의 추종세력들인 청주지방의 임춘길, 이흔암, 선장형제 등 반란이 끊이지 않아서 그 지방 호족들에게 동물의 성씨를 내리면서까지 탄압한 기록이 있다.

왕조가 바뀌면 이전 왕조의 기반인 지역은 새 왕조에서 경계하게 되고 또한 이전 왕조의 기반이 되었던 지역은 옛 영화를 되찾고자 틈만 나면 도발함으로 왕건이 궁예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청주지방을 경계하라고 후손에게 유훈을 남긴 것은 있을 법하다.

그런데 車峴以南과 車嶺山脈以南이 같고 公州江과 錦江이 같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매국노 사학자 이병도다. 조선을 3번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의 종친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일제의 조선통치를 정당화하는 식민사관이론을 만들고 주입한 주역이다.

전라도가 구한말 전국 의병의 40%를 차지하고 광주학생운동 등 일제에 대한 조직적 저항이 가장 강력했으며 서재필, 김성수, 송진우, 김병로 등 정계와 재계에 막강한 영향을 끼쳤던 전라도 출신들의 반일투쟁으로 친일파 이병도에게 전라도는 식민정책 시행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해방 후 이병도는 시대가 바뀌자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지우려 원광대에 있던 이완용의 자료를 훼손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국사학계 장악에 나섰다. 친일파들을 중용한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덕에 국사학계를 장악해 고조선, 삼한시대, 훈요십조 등에 대해 자신이 만든 이론만을 국사책에 집어넣었다. 이병도의 제자들은 이병도가 만든 이론들을 그대로 후세에 교육했다.

그런데 ‘호남인들을 등용치 말라’는 왜곡과는 달리 실제로 태조 왕건의 핵심 수뇌부에는 우리 영암 출신 도선국사, 최지몽, 곡성의 신숭겸, 장인인 나주의 오다련, 사위 박영규, 당진의 박술희 등 호남 출신 호족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으며 왕건의 장남 혜종의 외가도 나주다.
거란의 침입 시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을 왔다. 나주가 과연 훈요십조대로 위험지구였다면 강원도나 경상도로 몽진할 것이지 왜 나주까지 굳이 왔다는 것인가?

이후 조선시대까지 호남 인물을 등용치 않았다는 기록은 어느 곳에도 없는, 왜놈 이마니사 료와 친일 매국노 이병도와 그 제자들이 억지로 조작한 것이다.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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