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세상을 꿈꾸다’, 사라진 정여립 이야기

심심풀이 우리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1년 06월 17일(목) 09:55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광주문인협회 이사

정여립의 본관은 동래. 자는 인백. 전주 출신에 아버지가 첨정 정희증이요. 어머니는 박씨로 1546년생이다. 15세 때 익산군수인 아버지를 대신해 일을 처리할 때 고을 아전들은 군수보다도 더 여립을 어려워했다. 체격도 늠름했으며 통솔력이 뛰어났고 두뇌가 명석하여 경사와 제자백가서를 일찍 통달했다.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되었고, 1570년(선조 2) 24세로 식년문과 을과 2위로 급제한 뒤 이이와 성혼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았다. 1583년 예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수찬이 되었다. 당색은 본래 서인이었으나 이율곡이 죽자 집권세력인 동인편으로 돌아서 이율곡을 성토하고 박순. 성혼까지도 비판했다. 선조가 이를 괘씸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가 동인으로 탈바꿈한 연유는 여립이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율곡이 반대한 탓이라는 설도 있으나 직설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과 너무도 잘 맞았기 때문인 것 같다.

여립은 언변과 수완이 뛰어나 고향 전주에서 명망이 높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 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활쏘기대회를 여는 등 세력을 키워나갔다. 1587년 왜구들이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했을 때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에 응하여 대동계를 동원해 왜구를 물리쳐 기세가 등등했다. 그의 조직은 점차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 잔반과 선달 등 세력을 확장했다.

그런데 1589년 겨울 정여립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 후 병권을 장악하려 한다는 고변이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수 한응인이 연명 상소하여 관련자들을 차례로 추포했다.

이 소식을 접한 정여립은 금구를 떠나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다 선전관과 관군의 포위가 좁혀들자 자결하고 말았다. 그의 자살로 정여립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졌고, 서인 송강 정철은 이 사건의 위관이 되어 조사, 처리하면서 이발 형제와 무안의 정개청 등 처형된 자가 1,000여 명에 이른,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이 모반사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조작이라는 설과 역모라는 설로 나뉘어 학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조작설의 이유로는,

첫째, 정여립의 도피는 안악의 교생 변숭복의 급보로 이루어지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곧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집 안에 각종 서찰과 문서들을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연루자로 죽게 할 리 없다는 것이다.

둘째, 정여립 일당들이 도망간다면 연고지가 아닌, 지리산 같은 심산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며, 또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려 추포의 손이 곧 미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150년 뒤에 나온 ‘동소만록’에서는 그가 죽도에 가서 쉬고 있을 때 선전관이 달려와 정여립을 박살내고 자결했다며 허위 보고했다는 것이다.

넷째, 김장생의 ‘송강행록’에 의하면, 고변이 있자 중앙 관료들은 정여립의 도성으로의 압송을 고대하고 있는데 정철은 그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진하여 옥사처리를 담당했다는 것이다. 정철이 정여립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최고 지휘자라는 것이다.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작한 이는 정철의 친구인 송익필이다. 그는 노비 출신으로 서인당파의 참모로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인을 환천시키고자 동인당파의 이발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역모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반면, 그의 역모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첫째, 정여립이 남긴 문자 중에 ‘천하공물설’과 ‘누구를 섬기던 임금이 아니겠는가?’ 라는 ‘하사비군론’을 들고 있다. 하사비군이라는 말은 당시에는 참으로 혁명적인 발언이었다. 단재 신채호가 일찍이 지적한 대로,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을 타파하고 백성 모두가 잘사는 대동세상을 꿈꾸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발상이었다.

둘째, 그는 전부터 있었던 목자(李)는 망하고 전읍(鄭)은 흥한다는 참언을 이용해 전읍은 정씨인 자기를 가리킨다는 도참설을 퍼뜨려 이씨왕조의 운수가 다해 천명이 정씨에게 내려 새 왕조의 출현이 필연적임을 설파해 역모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셋째, 그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문’에는 선조의 실덕을 조목조목 열거해 이씨 왕조의 명운이 다했음과 졸군 선조 밑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추종자들에게 설파해, 혁명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정여립은 유명한 달변가였다. ‘천하는 공물’이라는 여립의 주장이 실현되었더라면, 서양의 크롬웰의 공화정보다 수백 년 앞서 공화정을 성취한 나라가 조선이 되었을 것이다.

기축옥사는 정철 각본에 감독은 선조였다. 주인공 정여립의 집에서 압수한 문서와 편지들을 샅샅이 검토하여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교류가 있었던 자들은 모조리 추포했다. 정여립과 모반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동인 이기, 황언윤, 신여성 등을 먼저 처형했다. 정여립의 조카 이진길의 집을 수색해 ‘지금 임금의 어두움이 날로 심하다’라고 쓴 편지가 발견되어 이진길은 장형으로 바로 죽었다.

정철 등 서인들의 목표는 이발을 위시한 동인 세력들이었기에 동인 측 인사들이 정여립과 연통하여 모반을 꾸몄다며 처벌의 상소가 빗발쳤다. 이발을 위시한 동인의 주요 인물들은 원지로 귀양으로 그쳤으나 12월 12일, 교생 선홍복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다시 이발 등 동인 측 중요 인물들의 이름이 나오자 다시 국문은 시작되었고 곤장을 맞다 죽은 이가 수백 명이었다. 선홍복은 억지 자백 후, 처형 직전 ‘이발의 이름만 대면 살려 주겠다 했으면서 이럴 수 있느냐’고 울부짖었다.

가장 처절했던 죽음은 한 가문이 멸문당한 이발의 집안이다.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은 본인뿐만 아니라 일가가 모조리 붙잡혀 선조 앞에서 국문을 당했다. 9대조부터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이었는데 가문 자체가 박살 났다. 선조는 이발의 어린 아들에게 “너는 네 아비에게 무엇을 배웠느냐”라고 묻자, 이발의 어린 아들은 “저는 제 아비에게서 충, 효 외에는 배운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말에 선조는 길길이 날뛰며 “역적의 자식놈이 저런 참람한 말을 하다니!”라며 이발의 어린 아들을 압슬형의 모진 형벌을 집행해 죽였으며, 여든이 넘은 이발의 노모 정경부인까지 장형으로 사망했다. 경국대전에는 노인과 어린아이는 고문하지 않고 노비로 전락시키도록 규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겨우 살아남은 이발의 후손들은 조상의 제사를 모실 때마다 고기를 다지며 “간철! 악철! 흉철”을 외치며 정철의 연일정씨와는 지금도 혼사를 회피한단다. 또한 제자를 가르치던 무안의 선비 정개청은 정여립의 집터를 정해 주었고 정철의 주벽을 비난한 감정으로 처형되었다.

기축옥사로 인해 전라도 지역은 반역향이 된 채 정여립 등 역모혐의가 덧씌워진 주요 인사들은 사지가 찢겨 8도에 조리돌림 당해 역적의 말로가 어떤가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아이러니는 반역향 낙인에 결정적 악역을 한 정철은 담양 소쇄원에서 사미인곡을 읊은 당대 제1의 시인이었다. 모질게도 호남쪽 선비들을 집요하게 숙청한 이유가 고작 정적 이발에 대한 한풀이에다 남명 조식의 수제자 진주의 최영경을 수괴 길삼봉이란 누명을 씌워 희생시켰다. 길삼봉은 황해도에 거점을 둔 미스테리 인물이다. 신분도 불명, 연령도 불명인 채 그 정체를 알 수 없어 길삼봉으로 엮여 죽은 사람은 헤아리기 힘들었다.

여기에 당대의 고승인 휴정, 유정대사도 역모에 연루되었다. 정여립과 가까이 지냈던 승려 무업이란 자가 심한 고문에 못 이겨 휴정과 유정이 역모에 가담했다는 무고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선조가 신임하여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이순신의 친구 조대중은 기생과 헤어져 눈물을 흘렸는데, ‘역신 정여립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며 큰 고초를 겪었고, 정언신은 정여립과 9촌 간이라는 이유로 투옥되었으며 이순신의 부하 안위는 정여립의 5촌 조카라는 이유로 훗날 공신록에서 빠졌으며, 김빙은 평소에 찬 바람을 쐬면 눈물이 나는 눈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립의 시신에 한 번 더 형을 가하는 그 시각에 찬 바람이 불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바로 “역적 놈이랑 무슨 관계이길래 눈물을 쏟는 거야!”라며 붙들리고 결국 처형당해 버렸다.

편집자 주: 1589년 ‘기축옥사’의 진앙이었던 전북 진안 죽도. 동인 정여립의 반역 첩보로 시작된 기축옥사는 이후 3년 동안 1000명에 이르는 동인이 죽거나 유배당한 대참극이었다. 정여립은 이 죽도에서 대동계라는 조직을 꾸리고 역적모의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옥사를 지휘한 서인 당수 송강 정철은 21세기까지 학살극 총책으로 비난받는 중이다. 그런데 여러 기록은 자기 권력을 위해 정철을 조종한 당시 최고 권력자 선조를 주범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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