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남북전쟁의 영암과 국사봉

심심풀이 우리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1년 06월 24일(목) 10:33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광주문인협회 이사

1950년 6월 25일 남북전쟁을 준비키 위해 북한 김일성은 남로당 당수 박헌영과 함께 1948년과 1950년 소련과 중국을 1차례씩 방문하여 스탈린과 모택동으로부터 남침을 승인받은 후, 북한군 총참모장 강건과 소련군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에프의 ‘남침계획서’가 5월 29일 완성되자 6월 25일 새벽에 불법남침을 감행했다.

‘북진통일’을 입으로만 주문하던 이승만 정부는 소련제 탱크t34와 야크기에 밀려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말았다. 수도인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전국민을 기만한 채 대구까지 도망간 것도 부족해 다시 목포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도망을 갔다. 서울이 수복하기 전까지 부산이 피난정부의 수도였고 피난 생활을 주제로 한 영화나 가요는 현재도 회자되고 있다.

이씨조선 500년을 통틀어 가장 비열한 졸군으로 치부되는 선조와 인조보다도 더욱 치졸한 위인으로, 다른 한편에선 대한민국을 구해낸 국부로 각각 다르게 평가되고 있는 현실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전세는 밀리고 밀려 낙동강 전선이 최후의 보류였고 미국의 맥아더 원수가 유엔군을 이끌고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 전까지 정부와 백성들은 좌충우돌 속에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절한 나날의 기구한 운명의 연속이었다.

우리 영암은 북한인민군 제1군단 휘하의 인민군 최정예부대로 훗날 영웅 칭호를 두 번이나 받은 6사단(사단장 방호산)의 15보병 연대가 1950년 7월 24일에 영암읍에 진입, 은거 중인 금강정치학원 출신의 남로당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보성 출신)과 지리산 빨치산사령관 김선우. 빨치산 지리산유격 총본부장 김백수의 지휘 아래 인민유격대 제3지구사령관 황점택(영암 출신), 유격대장 이방휴(영암 출신), 부대장 김영우(나주 출신), 민청년대장 한일수(완도 출신, ‘김대중회고록’의 등장 인물) 등 빨치산 일당들이 내응하여 일제히 발호하기 시작했고 1950년 10월 1일 국사봉으로 입산,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괴 인민군의 퇴로가 차단되자 지리산의 한 루트인 국사봉에 집결하여 밤에는 빨치산. 낮에는 경찰에게 양측으로부터 주민들은 큰 고초를 치러야 했다.

1951년 4월까지 국군과 경찰에 의해 최덕신의 ‘견벽청야작전’의 무차별 토벌로 인해 좌익과 무고한 양민들의 희생은 극에 달했고 그 후에도 우익과 좌익의 대립과 갈등은 계속되어 피아간에 숨진 희생자의 수는 정확히 파악키 어렵고, 군과 경찰에 의해 7125명이 희생되었다는 통계가 전해진다.

빨치산 제3지구의 국사봉은 장흥군 유치, 화순군 이양. 청풍. 도곡, 영암군 금정, 보성군 웅치, 나주군 다도면에 연접해있는 지역으로 빨치산들은 ‘내산(內山)’이라 불렀다. 주변이 산으로 쌓여 있어 공격을 받을 경우 방어가 쉽고 이산 저산으로 이동하기가 용이한 곳이다. 이 때문에 국사봉은 일제의 ‘전라도 대토벌작전’이 전개된 호남의병의 중심지요. 한국전쟁전의 이른바 좌익 이봉천이 이끌었던 ‘구빨찌’ 시절에도 전라남도 도당본부가 옮겨와 있을 정도로 투쟁의 요충지였다.

유치지구 관할은 장흥군, 나주, 목포시, 영암군, 강진군, 해남군, 화순군 일부, 진도군, 완도군, 고흥군 등 10개 시군이었다. 유치지구에는 입산해있던 시·군당이 10개나 되고 300여 명의 남해여단과 장흥유격대를 비롯한 10개 시·군당 유격대까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남도내 6개 지구 중 규모가 가장 큰 곳이었다. 유치지구에는 당 요원은 물론 그 가족과 동조자 그리고 좌익으로 의심받을 만한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1만여 명이 북적대고 있었다 전한다. 심지어 1951년 2월 20일 붕괴된 불갑산지구 요원들까지 모여들었다.

1951년 3월 18일,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남해여단이 전멸되고 그해 4월 24일 대공세를 받아 2,000여명이 사살되는 등 큰 타격을 입지만, 전남도당과 총사령부가 궤멸되는 1954년 4월까지 버티어 냈고 그 후에도 잔존세력이 은밀하게 활동했던 지구다. ‘유치빨치산’이라는 신문도 발행했다.

이때 유치지구 유격대 사령관은 황점택(일명 황병택)이었다. 황점택은 영암읍 출신으로 6.25전쟁 이전부터 구빨찌로 활동하다 소위 인공 치하때는 영암군당위원장을 지냈다. 9.28 이후 퇴각해서는 유치지구 유격대장, 총사. 책임지도원을 하였고, 그 뒤로는 지하로 내려가 당 재건공작을 하다가 금정면 국사봉에 설치한 자신의 비트가 군경에 의해 발각되어 중상을 입고 이송 중 여운재에서 절명하였다.

이런저런 사연 속에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이 같은 민족의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는 염원을 담아 다행히 영암군의회의 줄기찬 노력과 뜻있는 고향 어르신들과 향우들의 성원으로 2006년 11월 여운재 길목에 위령탑이 세워져 코로나19로 몇 년째 행사가 중단된, 금정의 ‘대봉감축제’ 때는 영령을 위로하는 제사까지 모시고 있으나 오가는 길손들의 마음을 숙연케 하며 그 당시에 희생된 조상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갈등과 노력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 금정면 여운재에 위치한 ‘6.25희생자 위령탑’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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