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시대 국도 1호선 ‘청암도’ 이야기 심심풀이 우리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1년 07월 15일(목) 1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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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도 1호선은 남한과 북한을 연결하는 목포에서 신의주까지의 큰길이요. 국도 2호선은 동서 간의 목포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국도로서 나라에서 붙인 큰길의 번호다. 홀수는 남북으로 이어지는 세로선 국도의 도로번호요. 짝수는 동서를 연결하는 가로선 도로번호다. 세로는 1·3·5·7·9호선이 있으며 가로는 2·4·6·8·10호선이 있다.
지방도로는 두 자릿수나 세 자릿수로 표시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국도 1호선은 과연 어떤 길이었을까? 바로 해남 땅끝에서 한양까지 가는 ‘청암도’의 역로가 국도 1호선이었다. 청암도는 조선시대 전라도 장성의 청암역을 중심으로 한 가장 중요한 역도(驛道)다. 청암도의 중심역은 찰방이 배치되었으며 지금으로 치면 철도청 호남지역본부장 정도의 위치다.
관할 범위는, 장성ㅡ나주ㅡ영암ㅡ해남방면으로 이어지는 역로와 무장ㅡ영광ㅡ함평ㅡ무안방면의 역로에, 광주ㅡ남평ㅡ병영ㅡ장흥 방면의 세 갈래 역로를 관리했다. 당시 국도 1호선인 해남 땅끝에서 한양으로 가는 역로가 바로 영암 금정과 영보를 통과해 청풍을 지나 해남 계곡의 별진리를 경유했다. 지금의 국도 23번길과 비슷한 길이다.
신라시대부터 시작된 이 역참제는 고려와 조선 후기까지의 교통 및 통신기관으로, 공문서나 물자 전송 및 군사적 목적으로 관리와 역마를 비치해 두는 매우 중요한 교통 기관이었다. 역참제는 몽골에서 처음 시작된 제도로서 역참은 30리, 원(院)은 50리 거리마다 설치했다. 역참에는 작은 고을 원님인 현감과 같은 품계의 종 6품직 외관을 나라에서 파견한 것을 보면 임무의 막중함을 엿볼 수 있다.
이 역참은 오늘날의 역(驛)으로 바뀌었고 해남에서 한양까지의 거리는 약 1,000리인데, 파발마를 타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달려야 3일 만에 겨우 도착했다고 한다. 청암도의 중심역인 본역을 전라도 장성에 그 본부를 두었다. 장성의 단엄, 진원의 영신, 광주의 선암, 나주의 신안, 영광의 녹사, 함평의 가리, 영암의 영보, 무안의 경신, 남평의 광리, 오림, 무장의 청송 등 11개 역을 관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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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도는 조선 후기에 역로가 약간 바뀌기도 하면서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존속되었다. 청암역은 청암도 찰방이 주재하는 본역(本驛)으로 장성 북쪽 10리쯤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원래 조선 초기에는 나주에 본역인 청암역을 설치했는데, 후기에 이르러 장성의 단암역이 청암도 본역이 되었다. 옮기게 된 사유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1755년 영조 이금의 왕위 계승을 비난하는 괘서가 나주관아의 금성관 객사에 나붙는 ‘나주괘서사건’의 영향으로 영조의 노여움이 이전의 원인이 된 것 같다.
찰방이 파견되는 역인 청남역을 본역이라 하고 본역에 속한 작은 역들을 외역 또는 속역이라 한다. 찰방은 본역과 외역을 통괄하는 관리로 겉보기에는 한직이나 역참을 거쳐 가는 벼슬아치들과 연을 맺어 한양의 고관들과도 쉽게 연결되어 쉽게 승차할 수 있었다. 역참의 역할은 왕래하는 나라의 벼슬아치들에게 숙박과 역마를 제공하여 나랏일을 안전하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임무다. 찰방이 주재하는 역촌에는 가까운 곳에 반드시 관립숙소인 원과 사설 주막 시설도 설치되어 관리는 물론이요. 나그네들에게도 숙박의 편의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역참에는 암행어사와 같이 공무로 파견되는 벼슬아치들의 숙박은 물론 각종 사무를 보기 위한 시설과 역졸들이 상시 배치되어 있다. 동헌, 내동헌, 작청, 공고, 형방청, 서자청, 급창청, 사령청, 창고, 하관청, 내삼문, 진남루 등 12개동의 역사 건물이 세워져 각각의 기능을 맡았으며 근무자는 역리 20명과 역노와 역비 527명을 배정하여 역의 사무와 역마 관리했으며 때로는 암행어사의 요청으로 역졸을 출두시키기도 하며 상등마 3필, 중등마 4필, 하등마 8필 모두 15필의 말이 상시 배치되어 벼슬아치들의 품계와 공무의 완급을 가려 교통편을 해결해 주었다. 영암의 영보역 같은 작은 역에는 종 9품직 역승이 배치되었으며 역마 4마리와 직원 6명 정도가 근무했고 영보역 인근의 보동에도 ‘보현원’이라는 숙박시설과 주막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역로 청암도는 오늘날 국도 1호선으로 한양에서 출발해 전라도 장성을 경유하여 남평의 오림ㅡ영암의 영보ㅡ해남의 별진ㅡ해남 땅끝ㅡ제주도를 연결하는 큰 역로로서 벼슬아치들의 부임과 제주도 유배길 유배자와 오가는 길손들의 큰 길목이었기에 보편적으로 백성들이 많이 모여 살았으며, 금정이나 영보 등 영암 백성들은 오가는 길손들과의 직간접 접촉을 통해 한양 소식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타지역 사람들보다 정보를 더 빨리 알 수 있었기에 그 대처도 빨랐고 한말 호남의병의 중심지로 영암이 크게 부상하는 그 한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추론해 본다.
영암일보 yailbo@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