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해(水害), 그리고 국가의 시간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1년 07월 22일(목) 1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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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시간이다. 국가 경영이라는 큰 뜻을 품은 이들이 몸 풀기를 끝내고 속속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격동의 현대사’, 또는 ‘다이나믹 코리아’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한국의 정치는 무엇보다 역동성을 특징으로 한다. 꿈쩍도 않을 것 같은 지지율은 작은 이슈 하나로도 요동을 친다. 추락과 비상은 정치의 평범한 풍경이다. 높은 기대와 함께 시작하는 정부라도 말년은 대부분 쓸쓸했다.
역동성은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심리적 변동성이 크기 때문에 가능하다. 변동성은 기대와 실망의 롤러코스터가 만들어낸다. 그만큼 한국인이 국가에 대해 갖는 감정은 이중적이다. 그 감정은 상대적으로 성공적이라는 코로나 19 방역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국가가 해주는 것이 없다는 불평은 일상의 용어다. 동시에 국가가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다고, 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코로나가 급속히 확산하면 대체 국가가 뭐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국가가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개인의 자유권까지도 기꺼이 내준다. K-방역의 성공은 일정부분 개인의 자유를 희생한 대가로 얻어졌다.
누군가는 K-방역의 성과를 성숙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승리로 상찬하지만 국가별 확진자 발생 현황을 보면 의심스럽다. 동아시아 국가인 중국, 싱가포르, 대만 등을 개인의 자유권이 특별히 폭넓게 보장된 국가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국가 권력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우위에 두는 영국, 미국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방역의 성과에는 강력한 국가 권력이 있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개인의 시간과 공간을 재구성할 수 있는 디지털 정보 기술은 서구 국가들도 구축하고 있다. 결국 서구 국가와 동아시아 국가, 우리가 갈라선 지점은 국민들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국가와 사회를 바라보는 심리가 아닐까? 사실 우리는 한동안 감염보다 익명의 시선을 무서워하지 않았던가? 확진자에 대한 온갖 억측과 흉흉한 소문은 SNS를 통해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그 ‘디지털 멍석말이’의 대상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정부의 방역지침을 고분고분 따르게 하는 힘이 아니었을까?
이철승 서강대 교수는 ‘쌀 재난 국가’라는 책을 통해 쌀을 주식으로 하는 민족의 독특한 국가관을 설명한다. 그가 꼽은 벼농사체제가 남긴 유산 몇 개만 생각해보아도 오랜 벼농사체제에서 생성된 문화가 현대 산업사회에도 여전히 우리를 규정한다는 지적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벼농사는 일시에 대규모 노동력이 동원되어야하기에 개인이 아닌 마을 공동체가 생산에 참여한다. 당연히 협업을 조직하기 위한 위계가 작동한다. 그것이 오늘날 엄격한 서열 문화와 연공급 위주의 노동시장으로 남아있다. 출구 없이 닫힌 네트워크 안에서 공동생산과 개별 소유라는 이중구조는 보이지 않는 경쟁과 질시를 만들고 타인의 평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심리를 키웠다.
벼농사의 성패는 물 관리에 달려있다. 부족해도 안 되고 넘쳐도 안 된다. 관개시설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규모 관개시설은 개인이 구축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개인은 국가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순순히 그 관리 비용을 조세로 납부하면서 물 관리를 국가에 위탁했다. 우리에게 국가는 여전히 ‘재난을 대비하는 구휼국가’로 서 존재이유를 갖는다.
반면 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밀농사체제에서는 거대 국가가 없어도 개인의 생산량 변화에 큰 차이가 없었다. 밀농사체제의 국민이 국가보다는 개인을 앞세우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렇게 보면 전 세계적 재난인 코로나 사태를 맞아 K-방역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벼농사체제가 남긴 평판에 대한 민감성, 대규모 재난을 국가가 통제하고 구휼해주리라는 국민들의 믿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최근 들어서는 잦은 비 등 궂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늦은 장마이면서 좁은 지역에 집중적으로 쏟아붓는 고약한 장마다. 전남지역에는 단 사흘 동안 많은 곳은 무려 531㎜의 집중호우가 쏟아지기도 했다. 집계되는 피해는 시간을 따라 늘어만 가고 있다. 가축 피해도 심각하다. 9개 시군 115 농가에서 축사가 침수되고 폐사가 속출하고 있다.
장마가 물러나면 신속한 피해복구와 지원에 국가의 자원이 일시에 모두 동원되어야 한다. 그런데 작년 섬진강 지역 수해 피해에 대한 보상은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물 관리에 대한 책임 공방 때문이다. 수해 원인과 피해 조사가 끝나도 주민들이 보상을 받으려면 환경분쟁조정을 신청해야 한다. 보상은 또 최소한 6개월은 미루어진다. 그동안 농경지와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생계마저 막막해진다.
믿음이 없으면 국가가 설 수 없다. K-방역처럼 수해피해를 당한 농민들에게도 국가가 믿음직한 존재여야 한다. 백성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는 물과 같다. 정치는 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수해 피해를 입은 농민에게 가장 우선 되어야 할 것은 과감한 보상과 지원이다. 책임규명과 항구적인 대책 수립은 그 뒤의 일이다. 이제는 국가의 시간이다. 이번에는 달라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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