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의 가문들

심심풀이 우리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1년 08월 12일(목) 13:27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강물은 소리 죽이고
백두산도 찡그리는데
티끌 같은 어지러운 이 세상
추한 벼슬아치만 우글우글
역대의 못된 간신전일랑
필히 읽어들 보시게나.
나라 팔아묵고 나라 위해
죽은자가 하나도 없다네.


매천 황현의 ‘절명시’다. 1910년 8월29일 매국노 이완용, 이지용 등 노론 세력 67명과 남인, 북인 등 9명의 조선 관료 76명이 매국에 앞장선 ‘경술국치’로 조선이 망하자 매천은 아들에게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가 망했는데 죽는 선비놈 하나 없으니 내가 대신 죽는다”고 하면서 절명시 4편을 남기고 음독자살을 택했다.

나라 존망의 위기에 누구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굶어 죽었고 누구는 친일파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다. 일제강점기 36년을 거쳐 조국광복 7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친일파들이 득세, 당당한 세상이 개탄스럽고 이념대립은 갈수록 심화된 채 독립운동가들이 도매가격으로 매도되거나 폄하되는 시점에서 독립투쟁에 앞장선 가문을 통해 애국정신과 파란만장한 삶을 함께 살피고자 한다.

먼저 독립운동가의 가문으로 ‘삼한갑족’이라 불리는 우당 ‘이회영’ 가문(경주 이씨)을 먼저 꼽고 싶다. 8대에 걸쳐 10명의 재상을 낳은 명문가다.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며 이회영은 조선이 멸망하자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노비 해방에 앞장섰다. 청상과부 누이의 재혼을 실천하며 봉건 잔재 타파에도 수범했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 속에서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도 앞장섰다. 수많은 재산을 최남선에게 헐값으로 처분하고 전 재산 700억원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모두 사용했다.

우당은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며 두만강 뱃사공에게 많은 뱃삯을 선불로 지불하면서 ‘일제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겨가는 독립투사가 돈이 없어 헤엄치면 강을 건너주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신흥학교를 세워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의 승리를 견인했다. 임시정부가 분열되자 실망하고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일본만주군사령관 암살을 준비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문으로 순국했다.

일가들도 목숨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첫째아들 이건영과 셋째아들 이철영은 약 한 첩 쓰지 못하고 병사했고 둘째아들 이석영은 가난으로 굶어 죽었다. 넷째아들 이회영은 여순 감옥에서 순국했고 여섯째아들 이호영은 독립운동 도중에 행방불명 되었다. 다섯째아들 이시영은 유일하게 살아남아 초대 부통령이 되어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하며 사임했다. 조국에 목숨과 전 재산을 바친 진정한 노블리스의 표상이다.

다음은 의병운동의 대부인 왕산 허위 선생 가문(김해 허씨)이다. 이 가문에는 왕산의 4형제인 허훈·허신·허겸·허위와 그 직계 후손들, 그리고 왕산의 사촌 허형 선생의 형제들과 후손들로 항일시인 이육사 선생 집안까지 포함된다. 이육사 선생의 모친이신 허길이 허형 선생의 딸이다. 10여명의 가족들이 항일투쟁에 참여했고 석주 이상룡 집안과는 사돈 간이다.

▲ 앞줄 오른편 말년의 이회영 [사진=나무위키]

왕산 허위는 13도의병 총대장에 지금 같으면 대법원장인 평리원서리원장까지 지냈다. 1908년 일제에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고, 대한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가 허위의 수제자였으며 약산 김원봉의 정신적 스승이 박상진 의사다.

안중근 의사 가문(순흥 안씨)은 직계, 방계를 포함해 총 15명이 독립운동을 했다. 안 의사의 삼촌 안태순을 비롯해 안 의사와 두 동생 정근, 공근 사촌동생 명근, 경근, 홍근, 조카원생, 낙생, 춘생, 봉생, 우생. 여성들로는 모친 조마리아 여사, 여동생 성녀, 조카 미생(백범 맏며느리), 조카며느리인 조순옥, 오항선 등이 독립운동에 참여해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

석주 이상룡 선생 가문(고성 이씨)은 고성 이씨 이퇴계의 종손 집안으로 경북 안동의 99칸 종택 ‘임청각’의 주인이다. 3천석 재산을 독립운동에 기부하였으며 직계 및 방계 포함해 총 11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석주 선생의 당숙 이승화 선생을 비롯해 형제인 상동, 봉희, 아들 주형, 손자 병화, 조카 형국, 운형, 광민, 매부 박경종, 처남 김대락, 처제 김락도 참여했다. 역시 퇴계의 후손답다. 서인 노론 송시열의 후손 송병준이나 윤치호. 박제순의 추잡한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만주벌의 호랑이’로 불린 일송 김동삼 선생 가문(의성 김씨) 역시 독립운동가를 다수 배출했다. 일송 선생을 비롯해 숙부뻘인 김대락 선생, 아우 동만, 형제 장식, 사돈 이원일 등 총 5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일송은 고향 안동에서 사립학교를 세워 민족정신 고취, 청산리 전투참가 후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경학사, 무관학교 설립 후 1919년 2월 간도에서 독립선언서를 작성 만세운동을 최초로 전개했다. 하얼빈에서 일경에 체포돼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중 1937년 옥사하셨으며, 만해 한용운이 시신을 수습해주었다. 아우 동만은 1920년 9월 일제의 간도 토벌 때 일본군에 피살되었다.

‘태항산의 호랑이’라 불리는 김두봉(김해 김씨)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약산 김원봉과 함께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으나 집안과 주변 사람들이 모두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김두봉은 한문을 공부하다 기호학교, 배재학당을 졸업한 수재라 한다.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의 제자로 ‘말모이’ 사건 주동자였고, 중국으로 가 임정요원으로 참여했다. 또 신채호 밑에서 신대한신문 주필을 했고 조선 독립동맹의 주석으로 중국을 누빈 연안파의 거두이다.

해방 후 입북해 북한의 ‘한글철자추진’에 앞장섰고 김일성대학 초대총장과 부수상까지 지내다가 김일성보다 13살 연상에다 지식수준이 더 높은 인테리로 견제를 심하게 받다 1956년 종파분자로 몰려 숙청, 비참하게 1961년 사망했다고 전한다. 홍명희, 최용건, 이시우와 함께 6.25 남북전쟁을 반대했다고 전해지나 확실치는 않다.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이 조카사위이다. 조카 박차정의 어머니인 사촌 누이 김맹련, 사촌 매부 박용한, 외당조카 박차정, 그리고 박차정의 오빠 박문희, 박문호와 매부 박용한의 동생 박일형, 김두봉의 6촌 동생인 김약수와 심지어는 사돈까지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박차정은 1910년 5월 경남 동래군 복천동 417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용한과 어머니 김맹련의 3남2녀 중 넷째였다. 1910년 5월에 태어나 광복되기 직전 해인 1944년 5월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34년을 일제와 투쟁했다. 박용한은 일찍부터 신문물에 눈을 떠 구한말 동래 지방의 신식학교인 개양학교를 나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고, 탁지부주사를 지냈다.

박차정은 민족의식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나 근대적인 교육을 받았고 신여성의 열린 삶을 행복하게 누릴 수도 있었건만 한 생애를 항일투쟁에 몸 바치기 위해 1931년 중국으로 망명.

13세 연상인 김원봉과 결혼 후 낯선 이국땅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선산을 호화롭게 치장하며 자기 집안이 판서, 관찰사를 지냈다며 가짜 비석을 세운 채 족보 자랑이나 하는 일부 졸부들의 못난 우를 범하지 말고 진정으로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애국 열사들의 가문들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길 소망한다.

▲ (시계방향) 안중근 의사, 일송 김동삼, 석주 이상룡, 박차정, 김두봉 [사진=나무위키]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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