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이야기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1년 08월 19일(목) 1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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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식 없는 먼 그대
곡성 고달면 동산마을. 밤, 섬진강가에서 소주를 마시며 오랜만에 별밭을 바라보다 목 쉰 소리로 날아 스쳐가는 두 마리 검은 날개 왜가리와 마주한다.
여무는 철쭉꽃 따라 지리산 정령치에서 바래봉을 거쳐 철쭉꽃 지는 산덕리. 스님이 두드리는 목탁소리 곁, 꽃 피는 아그배나무 아래서 젊은 부부가 사진을 찍어주라 한다.
외나로도 봉래면 작은 저수지. 외바늘 낚시로 잡은 붕어를 놓아주며 시간을 보내는데, 개구리들의 저 쉼 없는 울음소리, 둑길을 손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긴 웃음소리.
오늘 아침, 남은 김치와 고추장, 식은 밥을 비벼 먹고 밥그릇을 설거지하는데 부엌 창문을 통해 찔레의 노란 꽃술이 눈에 들어온다, 가는 봄날의 아픈 속을 찌르는. 아차, 손에서 미끄러진 그릇 깨지는 소리.
2. 이십만 원
그대가 떠난 후 천일(千日)은 보고픔에 가슴이 베어진 날들이었다며 능청을 떨어, 2년 넘게야 만난 전(前) 애인에게서 이십만 원을 빌렸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 돈을 한 장 한 장 짓이기고 있다. 할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을 머리를 쥐어 짜 초봄처럼 펼쳐보려고 한다.
몇 권의 책을 사 내 얄팍한 지식을 덧씌우기를 할까?
무가정보지에 내 살아온 경력을 실어 누군가 나를 알아준다면?
안면 있는 정신과 여의사를 찾아가 외로움에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라며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볼까?
내 미래의 삶을 파악하러 족집게 예언자를 찾아?
오래토록 말을 비우고 연락 없는, 섬에 사는 친구에게 왜 사느냐고 물으러?
3. 은발(銀髮)
때타올 이쑤시개 편지봉투 귀이개 1회용면도기 고무줄 접착테이프 종이행주 파리채 머리빗 쥐약 칫솔 면장갑 효자손 모기향
“이 물건들 팔아서 생활이 되나요?”
색안경에 낡은 등산모를 쓴, 흰 머리칼과 흰 수염이 대부분인, 불꽃이 검지와 중지에 닿을 듯이 담배를 빨고 있는, 팔십이 됐음직한 잡화장수에게 내가 물었다.
나의 모습을 이곳저곳 살펴보다가 물끄러미 내 눈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그의 눈썹 끝에 진동이 일었다.
“자네 같은 나이에.”
한숨에 회색 남방소매가 흔들렸다.
“내가 물어본 말이었네.”
4. 별과 나뭇잎
“어느 여름의 한밤중, 깊은 산 동쪽 하늘 별밭에서 붉은 별들만 후드득 떨어지더니 커다란 화로가 되어 숲속의 나뭇잎을 녹였단다. 나뭇잎은 녹아서 초록 시냇물이 되어 산 계곡을 거쳐 어느 산촌을 지나는 동안, 개울가 요 찔레 이파리를 건드리다 가시에 찔려 더 푸르게 변해서 강으로 흘러갔단다. 새벽쯤, 다시 남은 맑은 별들이 떨어져 숲속의 나뭇가지에 앉더니 나뭇잎이 되고 별빛들만 이슬이 되어 땅에 떨어져 모이더니 깨끗한 계곡물이 되었단다. 별이 원래 푸른색이고 나뭇잎들은 별이며 별빛이 물이라는 걸 아무도 모르게.”
“누나, 그러면 별 없는 밤하늘이 되게요?”
“저 먼 동쪽 바다에 밝고 동그란 달이 뜰 때, 물결이 일고 그 중 가장 빛나는 물결들만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다지 아마?”
열두 살인 사촌누나와 여섯 살인 내가 개울가에 앉아서 찔레 잎을 하나씩 따다 개울물에 흘려보내던 시절.
5. 고막원역
영산강을 따라서 가다보면 중간쯤 비어있는 작은 기차역이 있다. 이제는 영원히 무궁화호도 멈추지 않는 역. 그곳에 살고 싶다. 기차가 가끔 지나치면 스쳐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그 사연도 그려보고, 구석에 작은 침대 하나 놓아두고, 금이 난 유리창에는 종이로 별을 몇 개 오려 붙이고, 겨울에는 나무난로라도 피워 노란 주전자가 끓으면 그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아는 이름들을 하나씩 쓰며 누군가 기다리고 싶다.
오랜만에 많은 별빛이 쏟아져 내리고, 밤차를 타고 가는 창 가 어느 여인이 물빛 불이 켜진 창문이 궁금하여 슬그머니 눈길을 주는 곳. 잡초를 뽑다가 자그만 녹색 의자 옆에서 지나쳐 멀어지는 기차의 소실점을 한없이 바라보다 발돋움을 내릴지라도 기다리는 것이 좋은 곳. 그러다그러다 키 낮은 채소들의 씨앗을 심고 남쪽의 텃밭을 일구다가 바람 불고 밤비 오고 다시 겨울이 오면, 내릴 수 없는 당신이 불쑥 걸어서라도 찾아올 거라고 자위하며 유리창에 다시 입김을 호호 불어 그대 이름을 쓰고 싶다.
- 책 <사랑의 방명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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