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개 속에서(2)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1년 09월 02일(목) 1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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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안개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곡성(谷城)에 있는 섬진강 상류로 나는 가끔 낚시를 다니곤 한 적이 있었다. 몇 개의 작은 지류가 모이는 곳이어서 항상 물소리가 가득하였고 거기서 강은 넓어져 물이 조용히 흐르기 시작하여 낚싯대를 던지기에 상당히 좋은 위치였다. 강돌들은 아득한 세월동안 강물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서 모난 것들이 하나도 없고, 갈대와 작은 버들개지, 가는 모래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어 포근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9월의 하순 어느 날,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서둘러 낚싯대를 폈지만 강 건너 마을 정자 앞 가로등은 이미 켜졌고 그 불빛에 물소리가 나는 쪽은 반사된 물빛을 내게 다시 보내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인 일인지 고기는 그날따라 전혀 물지 않았고 나는 몇 잔의 소주를 들이켜다가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무렵, 약간의 한기에 몸을 추슬러 일어나 보니 벌써 동쪽은 여명의 하늘이었다. 점점 주위가 밝아지자 강 쪽의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오, 피어오르는 안개가 쌓이면서 강물과 함께 서서히 하류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강의 이불이었다. 발끝에 모여 있는 안개를 휘저어 보았지만 금세 제자리로 되돌아갔고 갈대의 끝자락과 버들개지의 우듬지만 보일 뿐, 안개는 모든 강을 감싸며 그렇게 묵묵히 자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 포근하고 아늑한 어머니 품 같은 모습이여. 강이 왜 늘 아무 말 없이 우리를 맞이하는지를 이제야 알겠노라. 나는 춥지만 모든 옷을 벗어던지고 안개의 강 속으로 서서히 헤엄쳐 들어갔다.
산 안개
고등학교 3학년 끝 무렵, 예비고사를 며칠 앞두고 친구가 머리도 식힐 겸 월출산에 가자고 연락이 왔다. 아마 시험의 중압감과 이성과의 만남에 대한 기피를 자신과 함께 하자는 의미였으리라. 나는 며칠 남지 않는 예비고사에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었지만 친구의 부탁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는 예전부터 대학을 갈까 은행원 시험을 볼까 고민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월출산 억새밭 언저리에 텐트를 친 시간은 영산강 하구 쪽으로 해가 기울었을 즈음이었다. 텐트를 치고 저녁을 마치자 보름달이 떠올랐고 온 하늘에 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달은 점점 떠올라 깨질듯이 밝아졌고 덕분에 별들은 가벼운 반짝임으로 물러났다. 달빛을 받아들이는 억새들의 새하얀 하늘거림을 보았는가. 햇빛으로 인한 선명한 억새의 모습과는 달리 달빛으로 인해 나타나는 음영이 또렷한 치명적인 또 다른 느낌의 새하얀 은빛 벌판을. 색다른 아름다움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때 도갑사 계곡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의 가슴에 맞닥트린 바람은 차가왔다. 그 바람은 종일 계곡을 감쌌던 해의 여운이 담긴 따뜻한 공기를 안개로 변환시키더니 빠른 속도로 관목과 억새들을 눕히면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반대편 동남쪽 강진 성전의 녹차 밭을 거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도 따뜻하였다. 그리하여 두 바람이 부딪히며 그 중간에 서있는 우리의 앞에서 서서히 안개 벽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거대해지면서 몇 십 미터나 치솟더니 하늘을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당신은 보았는가. 한 발자국을 옮기면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다른 쪽으로 한 발자국 옮기면 하얀 안개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오묘한 세상을.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잘 결정해라. 너의 인생을 위하여 이 산이 이런 장면을 보여주는 것 같구나.
다음날 아침, 안개는 산 아래에서 안개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모든, 인간이 머무는 곳을 가리며 감싸안고 있었다. 우리는 안개 속으로 서둘러 하산하였다. 친구가 말했다. 나, 은행원이 될래. 이 안개처럼 가족을 품고 가는 게 정답일 것 같다.
한참을 내려와 제법 물소리가 나는 계곡 옆 잡초 사이에 안개가 펼쳐진 시야 속에 구절초 한 송이가 외롭게 피어있었다. 나는 구절초에게 다가갔다. 안개 속에서 떨고 있는 정말 예쁜 구절초를 보며 앞으로 나타날 내 이성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희망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손을 대고는 젖어있는 그 꽃에게 키스를 하였다.
- 책 <사랑의 방명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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