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궁궐 이야기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1년 11월 18일(목) 10:40
김오준 시인 / 광주문인협회 이사
고려의 수도는 개경이다. 개성과 송악이라 불리운 고려의 태조 왕건이 태어난 고향이다. 우리 영암 출신 도선국사가 터를 잡아준 비기의 명당이라 전한다.

고려의 궁궐은 조선시대의 궁궐처럼 불리지 않고 통칭하여 만월대라 불렀다는데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의 안학궁, 신라의 반월성. 백제의 사비성. 조선의 경복궁처럼 별도의 공식적 명칭이 없다. 고려사에서도 본궁, 정궁, 본궐.이궁 등으로 나타난다.

만월대의 궁궐은 고려가 919년 궁예가 건국한 태봉국의 철원에서 개성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건설되기 시작했다.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그 후 1014년(현종 5) 새 궁궐이 준공되면서 기본적인 고려의 궁궐이 배치 되었다.

현종은 중국 궁궐제도를 본따 건물 명칭을 붙였고 100여 년 동안 고려 궁궐의 터전을 닦았다. 현종 때 조성된 궁궐은 궁궐로서의 면모와 위상을 잘 보여주었고 1124년에 고려에 왔던 송나라의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는 고려궁궐의 웅장함 대해 자세히 설명 되었다 한다. 불행히 1126년(인종 4)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리 때에 척준경이 방화하여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후 1132년에서 1138년 사이에 걸쳐 고려궁궐은 재건되었으나 1171년(명종 1) 또 다시 소실되었다. 고려의 궁궐과 전각들은 매우 화려하고 장식이 많아 짓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179년부터 다시 중건 하였으나 1225년(고종 12) 일어난 화재로 많은 전각들이 불에 타버렸다.

그 후 몽고의 침입으로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개성의 궁궐 재건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화도에 세워진 궁궐의 전각들은 명칭까지도 개성의 것을 따르는, 이른바 '작은 개성'을 구축했다. 개성의 궁궐은 환도 후 1270년(원종 11)에 재건되지만 궁궐의 위용은 예전만 못하였고 왕들은 이궁에서 주로 거처하였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의 침입으로 다시 소실되는 수난을 또 겪는다. 이렇게 불타버린 고려의 궁궐은 고려가 망할 때까지 끝내 온전히 중건되지 못하였다. 이처럼 외세의 침략과 무신의 난 등 내란으로 수 차례 고려 궁궐은 불타거나 제대로 복구되지 못했다.

고려 궁궐의 본궐은 북쪽의 송악을 주산(主山)으로 해서 그 남쪽 구릉지대에 지형을 이용하여 흙을 돋우어 형성한 여러 축대 위에 남북으로 건물을 배치하였으며 경복궁처럼 도성의 중심에 위치하지 않고 서북쪽에 치우쳐 있고, 궁궐의 전각들 역시 네모반듯하게 중앙의 직선축을 따라 배치되지도 않았으며 지형지세를 따랐다. 송악산의 경사지를 따라 자연조건에 순응하며 배치된 점이 특이하다.

만월대는 고려가 건국된 이듬해인 919년(태조 2), 태조 왕건은 송악산 남쪽 기슭에 궁궐 터를 잡은 뒤 공사를 속행했고 그해 완공함으로써 만월대가 창건되었다. 새 궁궐이 지어진 송악산 남쪽은 웅장한 겹겹의 산이 주위를 둘러 호위하는 명당으로, 선조부터 대대로 왕건의 가문이 저택을 짓고 살아온 곳이기도 했다.

고려의 본궁 역할은 별궁 수창궁이 대신하다가 조선이 건국되었고 역성혁명을 일으킨 태조 이성계도 수창궁에서 즉위했다.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 왕조는 만월대를 복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채 한양으로 천도했고 태종 때 잠시 머무르다 지금은 쓸쓸한 폐허로 남게 된 것이다.

고려의 법궁인 만월대의 중심인 정전은 회경전(會慶殿)이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어서 단층인지 복층인지, 지붕의 형태는 어떠했는지 등이 베일에 싸여 있기는 하나 가장 중요한 건물답게 상당히 크고 화려했다고 추정한다.

회경전의 북쪽 방향에는 왕실의 보물을 보관하던 장화전, 대신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던 원덕전, 조회를 열고 사신을 접대하던 건덕전, 비빈들이 기거하던 만령전 등이 배치 되어 있었다. 건덕전은 용도도 중요하고 규모도 커서 회경전에 이은 제2정전으로 사용되었다.

외국사신들의 드나들던 장령전, 집현전으로 개칭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연영전, 왕이 비교적 편하게 정사를 처리할 수 있는 편전인 선정전과 중광전, 임금과 태자의 침전 등 수많은 전각들이 만월대에 위치해 있었다. 창덕궁의 후원처럼 연회를 여는 데 사용되던 호수인 금원​도 여러 곳 있다. 임천각, 보문각 등의 누각들과 향복문, 태초문 등의 대문도 많이 있었다.

만월대는 이처럼 수많은 건물과 전각들을 품고 있던 고려의 정궁이었다. 또 만월대는 검소를 미덕으로 삼았던 조선과 대비되게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지어져 왕이 향락을 즐기고 위엄을 과시하던 금원들은 청기와를 올리고 각종 화려한 보물과 동식물, 광석 등을 전시해두는 등 특히 화려했다.

백성들의 안위는 아랑곳없이 고려왕실과 권문세가들은 부귀영화와 사치를 만끽했기에 아웃사이더인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정권이 바뀐 역성혁명이 일어나 고려가 멸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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