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말 최고의 요부, 나주출신 ‘나합부인’ 이야기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1년 12월 08일(수) 1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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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중 온갖 권세와 부귀에 수많은 스캔들의 당사자였지만 말년까지 편안히 살다간 여인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이웃고장 나주의 ‘나합부인’이다.
나합부인은 조선 후기 철종 때 안동김씨들의 일당 독재인 세도정치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안동김문의 수장이었던 최고 권력가 영의정 김좌근의 소실이 나합(羅閤)이다.
그녀는 본래 나주 고을의 기생 출신으로 뛰어난 미모와 기예가 한양에 까지 입소문이 퍼져 알려졌고 조선말 ‘날으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요, 호색가였던 안동김씨의 대부 김대감의 호기심이 발동해 당장 그 기생을 불러 드렸는데 소문 그대로 당대 제일의 미모에다 몸에 지닌 여러 재주가 특출하고 성격도 활달하며 낭랑한 언변으로 김좌근을 녹여 첫눈에 반해 그 자리에서 소실로 들어 앉혀 퇴근하기가 바쁘게 딸같은 나합을 곁에 두고 어쩔줄을 몰랐다.
나합(羅閤)이란 이름이 아닌, 당시의 관직중에 합하(閤下)란 보국숭록대부 정1품 영의정과 좌,우의정인 삼정승에게 붙여주는 호칭이다.
당연히 정실부인인 정승의 내명부에게도 남편의 지위에 합당한 '정경부인'이라 불러주었다.
군사정부 때 일본제국주의 산물인 고위장성들이나 대통령에게 '각하'라고 불렀던 호칭과 비슷한 개념이다. 그런데 정실부인인 정경부인도 아닌, 소실에게 정1품의 ‘합하’에서 유래된, 나주출신 기생출신 소실에게 나합부인이라 불리웠다니 참으로 대단한 존재의 여인이 였던건 같다.
본래 김좌근은 노론 시파 김조순의 아들로 태어나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친누나였다. 음서로 벼슬길에 올라 늦은 나이에 중시 병과에 입격해 파격적 승진으로 요직을 두루 거쳐 아비 김조순이 죽자 안동김씨들의 대부가 되었다. 그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많아 벼슬 청탁 뇌물을 독식하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이런 김좌근에게 청탁을 한 탐관오리들이 너무 많아 뇌물을 바치고도 벼슬자리를 쉬 얻거나 보장할수가 없어 김좌근을 만나기 전에 먼저 나합부인에게 수령방백들의 벼슬자리 청탁이나 승진의 뇌물을 선납 해 나합이 김좌근에게 베갯머리 송사를 하여 나합의 마음대로 김좌근을 요리해 나합을 통하는것이 만사형통의 지름길이었기에 벼슬자리를 얻은 자들의 입에서부터 시작된 이름이다.
마치 이명박 정부 때 대통령의 형님을 '방통대군'이라 세가에서 칭했던 사실과 흡사하다.
나합 부인의 고향이 전라도 나주여서 나주의 첫자 나(羅)자 에다가 정1품 벼슬을 칭하는 합하(閤下)의 합(閤)를 따서 나합(羅閤), "나주의 여자 영의정"이라는 뜻을 내포한 나합부인의 권세를 비아냥이 함께 담긴 별칭이었다.
출생이 천한 기생출신 소실이면서도 남편인 영의정 김좌근의 세도를 이용해 온갖 비리와 음행을 소실인 나합 집에서 이루어졌다.
지방 수령으로 나갈 벼슬아치들은 나합에게 고을 수령자리는 고을의 크기에 따라 10만냥에서 20만냥으로 나합에게 청탁을 했고, 청탁자 중 힘이 세고 잘 생긴 벼슬아치 사내들이 오면 나합은 늙은 김좌근에게서 못 다한 본능적인 욕망을 그들과 공공연하게 풀었고 나합의 눈에 들어 놀난 파트너는 임용도 일사천리로 이뤄졌고 거기에 벼슬살이 중 비리가 들어나도 나합이 뒷배를 봐주면 보험을 든배와 마찬가지 였기에 지방 수령들은 물론 중앙관료들도 나합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나합의 생각은 어차피 남편 김좌근이나 안동김씨들에게 갈 뇌물을 내가 좀 챙기는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벼슬아치들은 삼정승이나 이조판서 보다 나합의 눈치를 더 보았고 나합에게 찍히면 그날로 현직의 벼슬자리도 날아가는 판국이었다니 나합의 입김과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하리라.
거기에 나합의 성격이 대범하고 특이해 가난한 어린시절의 기억은 잊은채 교만방자에 임기응변이 뛰어나 김좌근이 퇴청하여 나합의 집으로 돌아오자 김좌근에게 말하기를 "영감! 집 대청에 앉아 도성을 굽어보고 싶은데 아랫채가 너무 높아 앞을 가려 답답하기 그지 없으며 우리집 앞의 집들이 또 가리고 있으니 정말 천불이 납니다. 저기 저 아랫채들을 허물고 우리집 앞의 걸쩍거리는 저 집들을 모두 허물어 앞이 트이게 해 도성안을 굽어보게 해 주소서" 하며 남편을 조르자 김좌근은 수염만 쓰다듬으며 헛기침으로 얼버 무리다가 나합의 온갖 애교와 토라짐에 성화를 견디지 못한 김좌근은 할수없이 그 아랫채들의 네 기둥을 서너자씩 잘라내어 높이를 주저 않히고 앞쪽의 민가 몇채도 사들여 없앤 후 앞을 트이게 해주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이런 일들을 나합부인은 아무꺼리낌 없이 예사로 저질러 대고 재물을 탐하니 소문이 퍼져 나합과 김좌근, 안동김씨들을 도매값으로 욕하며 비난하는 소리가 장안에 퍼져 김좌근의 양아들 예조 판서 김병기가 참다 못해 아비 김좌근에게 나합의 처신을 단속해줄것을 직언했다.
나합은 그 정보를 미리 알고 양아들 김병기에게 미인계를 써서 유혹하여 입을 막고 자기 편을 만들려고 했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안동 김씨중에서 김병기가 가장 쓸만한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듯이 김병기는 나합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지 않았단다.
나합은 전라도 나주 영산포 포구 영산동에서 태어났다.
전라감사 이서구의 출생에 대한 예언과 관상대로 나합은 어렸을 때 부터 어찌나 예쁘고 애교가 뛰어났던지 온 동네 총각들이 눈독을 들였고 동네 빨래터인 도내기샘에 빨래를 가면 사내들이 줄을 서 구경했다고 한다. 구차한 가정형편으로 지방 기방에 들어가 수업을 마치고 기생이 되었다가 세도가 김좌근에게 발탁이 되어 수직 상승을 하게 되자 타고난 기교에 야망을 제대로 발휘해 결국 이서구의 예견대로 천하의 요부가 된 것이다.
특이한 것은 나주지방에 심한 한해가 들었을때 남편 김좌근을 졸라 부정축재한 재물 수십만냥을 구휼미로 나주관아에 보내 구제에 앞장서 나주의 금성관에는 지금도 두 도막난 김좌근의 송덕비가 현존하고 있다.
또한 나합은 벼슬 청탁자들 중 잘 생기고 힘이 장사였던 양주 선비를 그녀의 수청을 들게하고 비단 몇필만 받고 양주 군수 자리를 내주었으며 벼슬아치들중 호감이 가면 과감히 자기 집으로 불러 사랑을 나누는 간이 큰 음녀였다.
더 대단한 일은 흥선군 석파 이하응의 파락호 시절에 모든 안동김씨들이 거의 양아치 취급을 했으나 유독 김좌근과 나합은 흥선군을 매우 호의적으로 대해 주고 석파의 난초 그림을 서슴없이 사주며 용채를 주었다.
영의정 김좌근과 왕족 흥선군의 관계 설정에 눈치가 빠른 나합의 선견지명이 정확했던 것 같다.
흥선군도 능청을 떨며 나합에게 왕족의 체통을 버린채 "형수님"이라고 접근하였다니 백년묵은 능구렁이와 꼬리 셋 달린 여우의 줄다리기였다.
절치부심 속에 기회를 노리던 흥선군이 1863년 집정하고 그의 천하가 되어 강한 드라이브로 왕권을 강화하고 급진적 개혁을 구사함에 안동 김씨들은 한치 앞을 알수없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안절부절하며 흥선군에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
김좌근과 나합은 흥선군과 협상해 40만냥을 경복궁 중건 자금과 고종의 혼례비에 기부하고 안동김씨 문중은 60년 세도정치의 괘씸죄를 물어 그 추징금으로 100만냥의 원납금을 징수해 공사비로 조달하고도 대원군은 안동김씨 일족을 대거 숙청했다. 다행히 김좌근과 나합은 평소에 대원군에게 적선을 베풀고 40만냥을 주고 큰 핍박 없이 여생을 마칠수 있었다 한다.
대원군의 주장대로, 실로 안동김씨들은 정조임금 승하 후 1801년에 등극한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가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이 책봉된 후 부터 1863년 철종이 승하하여 조대비와 흥선군이 정권을 잡기 까지 그 일족들은 당시의 권력기관인 비변사 구성 요원 30명의 과반수를 장악하고 김좌근의 좌지우지속에 이조판서, 병조판서, 대사간, 대사성, 훈련대장 등 나라의 요직은 모두 차지했으며 과거시험 합격자도 안동김씨들 판이었다. 더군다나 효명세자와 조대비의 아들 헌종이 23살에 죽자 언문도 제대로 몰랐던 강화도령 이원범을 허수아비 철종으로 내세운채 백성들이야 굶어죽건 말건 안동김씨들의 창고에선 고기 썩는 냄새가 장안에 진동했다고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지적했다.
그런데 문제는 나라의 임금도 안동김씨들 맘대로 흔들었건만 오직 나합만은 건들수 없는 철옹성이었다.
안김들은 수 차례 모임을 갖고 나합의 비행을 성토했지만 남편 김좌근의 적극적 비호로 끝내 쫓아내지 못하고 건재 했다. 나합이야 말로 과시 조선 역사상 그 누구도 능가할수 없는 희대의 요부였던 것 같다.
그 얼마나 임기응변이 뛰어났던지 하루는 김좌근이 집에 돌아와 자기 소실 나합을 불러 엄히 묻기를 "세상 사람들이 자네를 나합, 나합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였다.
이에 눈 하나 껌벅하지 않고 나합이 받아 답변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여자를 희롱하기를 합(蛤, 조개)이라 하지 않사옵니까. 아들을 낳으면 고추, 딸을 낳으면 조개라 하잖아요. 그러니 저를 나합이라 할 때, 합은 조개 합자입니다."라고 해 위기를 모면 할 정도로 기막힌 언어의 마술사였다.
아무래도 나주 영산포 출신인 그녀 나합은 드넓은 나주평야의 큰 들판을 어려서 부터 누비고 자라 통이 나주평야처럼 컸고 나주의 특산품 나주배를 많이 먹어 성격이 분명하고 시원시원 한데다 영산포의 홍탁을 즐겨 소화가 매우 잘 되었기에 그 큰 재물을 삼키고도 탈 한번도 없이 늙은 남편에게 못받은 사랑을 스스로 해결하고 언어적 기교와 순발력으로 가볍게 웃음으로 날려버린, 그 대범함은 중국의 즉천무후를 능가하고 어우동 보다도 한 수 위였던 조선말 희대의 자유부인의 대명사가 나주가 낳은 전무후무했던 합하부인 나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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