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찾습니다. 고려대 김성학을!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1년 12월 31일(금) 10:18
김오준
시인 / 광주문인협회 이사

김성학은 영암군 금정면 아천리 395번지에서 아버지 김재업과 어머니 박명심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동네 아천리는 백룡산 줄기의 배산임수형의 촌락으로 마을 앞 냇가에 겨울철이면 유달리 까마귀가 많아 아천리로 지명했다 전한다. 행정구역 변경으로 지금은 분구가 되었지만 100여 가구의 아천리 주민들은 형님동생하면서 수백년을 옹기종기 어울려 함께 살았으며 그 지긋지긋한 6.25 전쟁 때도 좌,우익의 편가름 없이 동네 사람들의 살상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도 큰 다툼이나 형사사건 없이 가난하지만 양심을 지키며 선하게 살아왔고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품질의 특산품 대봉감의 주산지로 긍지 속에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아천리는 420 미터의 백룡산의 정기를 받아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동북아 화엄종의 최고 권위자인 동국대 부총장 김지견 박사와 콩나물 박사로 유명한 조선대 박원기 박사 등 교육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당시엔 경지 정리와 수리시설이 부족해 대부분 천수답을 경작하면서도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아 뼈가 부서지는 고생 중에도 자녀들만은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욕심으로 서울이나 광주로 유학을 보내는 가정이 많았다.

고려대 학생회 소속 학원자율화 추진위원장으로 학생운동을 하다 실종된 지 30년이 지났건만 행방이 묘연한 김성학도 바로 이런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란 보기 드문 수재였다. 그는 금정초등학교와 금정중학교를 거쳐 광주인성고를 졸업 후 고려대학 수학과에 진학했다.

당시의 사회상은 12.12쿠테타로 집권한 극악무도한 전두환 정권을 계승한 노태우 정권의 집권으로 민주화를 외치던 학생운동권이 최고조로 치달아 서울과 광주는 최루탄 연기가 자욱해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으며 운동권도 소위 엔엘파가 주도적으로 활동해 과격한 시위가 전개되던 혼란 속의 암울한 시기였다. 아니, 우리 5000년 역사 중 가장 힘든 군사정권 독재시대였다. 정권 유지 차원으로 최루탄 소비 세계 1위의 데모시대였다.

거기에 운동권 학생들의 교양 필수로 불온서적이 범람했고 1980년 5.18광주민주항쟁에서 보여준 강대국 미국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광주문화원에 폭탄이 투척될 정도의 격렬한 반미운동이 펼친데다 민족작가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운동권 학생들의 필수교재로 반정부 운동의 촉매제가 되었고 거기에다 광주 진흥고 출신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운동권은 과격시위로 치달았으며 한총련 등 운동권의 주도세력들은 도회지 출신들이 아닌, 농어촌과 산촌 출신 학생들이 그 중심에 섰으며 특히 전라도 출신들이 학생 운동에 많이 참여했다.

학연, 지연의 선후배의 얽힘도 큰 영향을 미쳤고 운동권 학생들이 시위 도중 체포되면 운동의 참여 강도에 따라 구금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거나 강제 징집되어 전방에 배치된 서슬 퍼런 참담한 시절이었다. 더군다나 1986년 광주 용두동 출신 서울대 이재호 열사의 분신 투쟁은 신호탄이 되어 울분과 분노의 분신 투쟁이 곳곳에서 연이어 일어났다.

김성학의 부모님은 본성이 선한 농사꾼으로 가난했지만 부지런했고 항상 웃음과 유머를 지닌, 낙천적 성격의 소유자로 한 번의 다툼이나 시비가 없었으며 특히 어머니 박명심은 큰소리 한번 내지 않은 음전한 시골아낙이였다.

소작농과 품팔이로 4남매들을 고등학교까지 가르쳤으며 수재였던 큰아들 김성학에게 큰 기대를 걸고 서울로 유학시켰다.

천만다행으로 작은 아버지 김준희씨가 그 시절 인기가 많았던 자개장사로 서울에서 기반을 잡자 큰 조카인 성학을 거두며 학비를 조달하고 보살펴 주었다.

김준희 씨는 사람 좋기로 소문난 분으로 자기 형편이 넉넉치 않았지만 조카 성학이 하나만 잘 가르쳐 놓으면 집안이 일어날 것이라는 큰 기대로 자기 친딸 보다 더 신경을 써 조카 성학을 보살펴 주었다.

작은 아버지 댁에서 기숙하던 성학이 학교가 멀다는 이유를 들며 자취를 고집했고 할 수 없이 조카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추론해 보면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기 위한 그 방편으로 자취를 택했던 것 같다.

김성학은 가난한 형제들 틈에서 어렵게 자라서인지 체구가 왜소한데다 안경을 낀 첫인상은 약간 날카로워 보였으나 지독한 노력파에다 논리력이 대단히 뛰어난 학구파였다고 한다.

특히 친구 간 의리가 깊어 자기보다 더 불우한 친구들을 찾아 관심을 갖고 보살펴 주는 따뜻한 가슴을 지닌 학생이였다. 서울에 살면서도 만학으로 졸업하는 고향친구들의 졸업식에 꼭 참석해 격려해 주었던 의리 있는 친구였다.

나와는 나이차가 꽤 많은 내 막내 여동생의 졸업식장에서 그를 처음 보았는데 고대 수학과에 재학 중이라고 여동생이 자랑스럽게 소개해 점심을 나누면서 대단하다고 칭찬도 해주고 큰 인물이 되라는 덕담도 나눴는데 그게 첫 만남과 동시에 마지막 만남이었다.
성학의 시골집은 우리 집과는 담장 하나 사이의 가까운 이웃이었다. 언젠가 시골집을 갔었는데 동네가 왠지 어수선했다.

성학의 행방불명으로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그 사실이 가정의 불화가 되어 선한 성학의 모친께서 홧병으로 비명에 돌아가셨던 것이다.

지금은 어엿한 호남의 유명 사업가로 성공한 어린 동생 김성진은 형의 실종소식을 접하고 군인이었기에 발만 동동 굴렸다. 제대 후 사업을 팽개치고 작은 아버지와 함께 형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형의 행방은 알 수 없고 사상범에 대한 수사당국과 정보기관의 서슬은 너무도 파래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한 채 형과 조카를 꼭 찾아달라는 애원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김성학의 실종사건을 다시 탄원하기에 이르렀다.

아우인 김성진은 형 김성학을 1990년 11월 18일이 형을 본 마지막 날이었다 회고했다. 신병교육을 마친 동생 김성진을 면회하러 부모님과 함께 통닭과 떡을 준비해 왔었는데 운동권'이었던 김성학은 동생에게 불온서적 10권을 건냈다.

성진은 문제가 안 될 책만 두 권 남기고 나머지는 형에게 돌려주면서 두 살 터울의 형 성학에게 "형은 공부나 열심히 하소"라는 충고도 했다. 그날 이후 형을 볼 수 없었고 1991년 고려대 총학생회 산하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김성학은 3월 어느 날 자취생활을 하던 후배들에게 "학교에 갔다 올게"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지난해 2월 광주에서 모 언론사 기자와 만난 동생 김성진은 인터뷰에서 "그때 면회하면서 같이 밥을 먹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형은 불온서적을 건네주면서 지금은 공평한 세상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고, 부르조아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했으며 그 후 유서 같은 편지를 동생에게 보내왔고. 작은아버지 김준희 씨께 보낸 내용도 마치 어디론가 떠날 것 같은 내용이었다고 인터뷰했다.

성진은 형의 실종을 타살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 근거를 "몇 년 전에 아는 사람을 통해 안기부에 근무했던 직원한테 알아보니 형이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있어서 바다에 수장했다는 기막힌 얘기를 들었다"라고 주장했으며, 형 성학의 성격 자체가 타협을 잘 안 하며 외고집도 있어 한번 빠져들면 끝까지 파고드는 몰입형의 소유자였기에 학생운동을 끝까지 고집해 변을 당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백방으로 형을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통해 형의 '30년 실종사건'을 풀어 주라며 청원신청 후 인내심을 갖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김준희 씨는 조카가 실종되자 하도 답답하여 고려대 학생회관을 찾아갔었는데 학생회관의 벽에 '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는 빨간 현수막이 써 있는걸 보고 억장이 무너졌고 '오매! 이 놈 새끼가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었나?' 하며 조카를 끝까지 집에서 함께 보살피지 못했음을 가슴을 치며 통탄했다.

정신을 차려 조카의 자취방에 가니 세 명의 학생들은 성학이가 어디에 간지도 모른 채 아침에 사라졌다니까 한겨레 신문지국에 갔을 거라고 단순한 대답을 하더란다.

한겨레 신문이 1988년도에 창간했을 때 김성학은 양천구 신정지국 총무를 맡았으며 한겨레신문 창간 주주로 20주를 산 진보적 노선의 학생이였다.

그가 실종되기 전 몇 차례의 동생의 편지 때마다 '성진아 미안하고, 네가 잘 해라.'는 내용에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얼른 정리해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앞이 캄캄하다.'는 내용도 덧붙였다고 한다.

동생은 답장으로 '공부나 열심히 해서 좋은 회사 가서 잘 살아야제. 어머니 아버지 고생하시니까 한달에 한번은 부모님을 찾아보라'.고 권면했단다. 동생 성진은 군에서 전역 후 학생회관을 찾아 최홍재 고대 총학생회장을 만나 사건 당일 형의 행적을 묻자 학생회관에는 안 왔다고 하였다는 것이며 그 후 몇 년이 지나고 아는 지인을 통해 옛날 안기부에 근무했던 직원한테 알아보니 형 성학이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있었다는 아리송한 얘기를 들었단다.

하두 답답하고 막막해 형이 민족해방을 주장하는 엔엘파로 북한 추종내용의 불온서적을 많이 소지했었기에 혹시 북한으로 입북했거나 고달픈 운동권 생활을 접고 승려가 되지나 않았나 하며 온갖 수소문을 다 했지만 끝내 소식은 없었다.

한강에 시신이 뜰 때마다 동생과 작은 아버지는 생계를 접고 달려갔으나 허사였다.

성학은 광주에서 고등학교 학창시절 도시락을 세 개씩 싸서 점심에 먹고, 저녁에 학교가 끝나면 바로 독서실로 가서 새참을 때운 후 새벽까지 공부했던 지독한 학구파였다. 아침 6시에 자취방에 와서 다시 준비해 학교로 가는 모범생이었고, 노력파였기에 공부를 잘해 집안에서 크게 기대했고 명문 사학 고려대에 합격했기에 더욱 자랑스러웠다.

김성학의 자취방 고대 후배 송경환은 실종 30년 고대생 김성학의 고려대 수학과 1년 후배다. 그가 실종됐던 1991년 3월, 김성학과 성북구 동선동에서 같이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성학의 마지막 모습을 본 자취방 후배 3명 중 그 하나이다.

지난 2월 19일 서울 여의도에서 기자를 만난 송 씨는 "성학이 형이 1991년 3월 저녁 8~9시쯤 됐는데 '학교에 갔다 온다' 하고 나갔다"라며 "그런데 저녁에 자고 아침에 깼는데 머릿맡에 편지가 있었다, 유서 같은 걸 적어 놓고 사라진 거다"라고 당시 상황을 자세히 전했다.

당시 고려대 수학과 학생장이었던 송 씨는 "그때 선배들은 공장 같은 데 위장 취업하러 갔을 것이라고 했다"라며 "며칠이 지나도 흔적이 없었지만 저희들은 자살 등 극단적인 생각까지는 안 했다"라고 회고했다.

그런데 김성학이 실종된 직후인 4월과 5월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사망하고, 여러 명의 대학생들도 분신하는 '분신정국'이 만들어지면서 그의 실종사건은 자연적으로 파묻혀 버렸다.

"그 정도 사건이면 학생들이 일어나 이슈화를 시도했을 수 있었을 텐데 누구도 그렇게 할 생각도 없었다"라며 "그때 왜 적극적으로 성학이 형을 찾아보려고 안 했는지 미안하기만 하다"라고 심경을 토로했다.

그가 실종된 지 30여 년이 지났다. 그러나 여지껏 소식이 없다.

그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가 태어난 영암 금정은 전국에서 면단위 최고로 많은 의병 49명을 배출한 호남의소의 중심인 의향이다.

그의 조부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살다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왔기에 성학의 고모들과 작은 아버지들은 일본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하였으며 625 남북전쟁 때 좌익운동을 한분도 계시지 않았는데 왜 그가 학생운동에 그토록 깊이 빠졌는지 의문이다.

그의 동생 김성진은 막냇동생을 데리고 리어카 과일행상으로 시작해 근면성실의 노력 끝에 호남에서 이름난 굴지의 대사업가로 성공해 고향사랑운동에 앞장서며 광주애육원 등에 기부를 솔선수범하는 모범적인 복지운동가요. 김성학의 고숙인 김한종 씨는 노인회장을 수차례 연임하면서 후세를 위한 장학금을 기천만 원을 기부하고 불우한 이웃을 위해 선행의 손길을 아흔이 다 된 년세에도 계속 이어져 온 면민들의 존경을 받고 계시는 분이다.

특히 성학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조카들의 삶을 친자식들처럼 챙겨 주셨다.

이처럼 형이나 조카가 채 못다한 공부를 성학의 후배들을 통해 이루려는 간절하고 아름다운 몸짓의 적선으로 여겨진다.

생존해 있다면 이제 50대 중반이 넘은 멋진 사내 김성학이 제발 환한 얼굴로 고향에 나타났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 속에 글을 맺는다.

[약력]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이 기사는 영암일보 홈페이지(www.yailbo.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www.yailbo.com/article.php?aid=1207612294
프린트 시간 : 2026년 09월 26일 20:3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