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박죽이 끓는 동안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1년 12월 31일(금) 1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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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에서 온 늙은 호박 중 하나를 반 갈라 엎어놓고 스텐숟가락으로 껍질을 긁었습니다. 누룽지도 긁고 호박도 긁어 사선으로 닳은 어머니의 놋숟가락이 생각났습니다.
팥을 삶으며, 이번에는 서울 사람들처럼 쌀을 넣고 끓여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냉동실에서 찹쌀가루를 꺼냈습니다. 중학교 진학 이후 50년 이상을 줄곧 객지에서 살면서도 음식 맛의 뿌리는 여전히 고향에 있습니다. 서울 음식 중 낯설고 이상했던 음식이 새알심 대신 밥알이 든 팥죽인데, 여전히 친숙해지지 않습니다.
두 주 전, 제 서사시집에 대한 출판 계약을 했습니다.
전라도 말 대화로만 이어지는 책입니다. 표준말 지문조차 없어서 다른 지역 출신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내심 염려했습니다. 다행히도 서울 출신 편집자가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애틋한 정서 원형이 전라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방언을 잃으면 우리말의 풍부함이 완전히 사라지겠어요. 이 책을 편집하게 되어 명예스럽습니다.”라는 편집자의 말은 저자인 제가 아니라 전라도 서남해안 방언과 정서에 대한 헌사였습니다.
이 책의 내용에도 소소한 군입정거리나 음식들이 자주 나옵니다.
움에서 파온 겨울 무시, 살얼음 낀 콩나물국, 찰밥, 불 때고 남은 재에 묻어둔 감자, 배추동치미, 사불것탕, 도마에 굴려 만든 가래떡, 무시 깔고 지진 갈치 등입니다.
잔치 음식이나 특별한 별미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냄새는 살짝 나지만 맛있었던 죽상어나 홍어찜, 꼬막, 잡채, 갈비는 원고를 쓰는 동안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보잘것없지만 피붙이처럼 소탈하고 정스러운 음식들이 제 기억의 앞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요.
하긴 책 속의 등장인물인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그을음 어린 호롱불 밑에서 실 감고 다듬이질 하다가 먹는 음식들이 별다를 리 없지요.
제사 음식은 망자의 침묵처럼 슴슴하지만, 일상 음식은 함께 나눈 식구나 이웃의 정이 맛깔진 양념입니다. 조단조단 나누던 이야기와 까르르 터지던 웃음이 없다면 또렷한 맛의 기억도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끓인 호박죽 속 호박, 팥, 찹쌀은 모두 고향에서 온 것입니다. 새해에도 매달 초가 되면 저희 집으로 영암농부들의 <기찬꾸러미>가 도착할 것입니다. 받을 때마다 정답고 반갑습니다. 마트에서도 살 수 있는 식재료들이지만 물건이 아니라 고향이 오는 셈이라 남다릅니다.
홍어애국에 넣을 보리싹 베러 가면, 눈밭의 까마귀 떼가 우하니 날아오르던 겨울입니다. 그 시절의 청명한 고향 하늘이 그리운 날입니다.
[약력]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등단.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
장편동화 <너랑나랑평화랑>
공저<그대, 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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