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에서

에세이 ‘사랑의 방명록’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1년 12월 31일(금) 10:36
박석구
시인
어느 날 노루잠 꿈속에 들어서서 명암이 흐린 당신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다가서는 꿈의 실체는 나의 입술을 깨물며 씹어대는 이해할 수 없는 저문 당신의 끝없는 폭력이다. 몸서리로 일어나 당신의 모습을 회상해보지만 늘 모호함에서 끝이나고 잠자는 아기 고양이의 그림자처럼 그 테두리만 뿌옇게 남는다.

가령 그 아득한 청춘의 정점 어느 날, 머리칼이 몇 가닥 흘러내리는 정갈한 당신의 이마보다 청결한 귓바퀴만이 기억의 지문이 되고, 당신의 다문 입술과 깊은 우물 같은 눈망울보다 짜낸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연붉은 여드름 자국이 시드는 초롱꽃처럼 추억될 뿐이다. 언제라도 꿈속의 꿈으로라도 다시 돌아가 곱고 착한 당신을 만나고 싶다.

청명한 어느 봄날의 사랑, 그녀와 미친 듯이 결혼하고 싶었고 쓸쓸하였다.

나는 편지를 썼다.

왜 이럴까요? 살려고 멀리 떠나 있을수록 먼 그대가 자꾸 생각나는 것은? 민주씨와 떨어져 있는 아득한 정처는 나를 무척이나 외롭게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민주 씨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가부의 답장을 주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이 울보가 이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 기대어 살아갈 것 같습니다. 날 알아주신 다른 사람이 날 평생 사랑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다시 안녕.

나는 그 답장에 허망하였고 눈물이 났으며 더 외로워졌고 가슴이 정말 아팠다. 같은 사무실의 직원이 점심시간에 탁구를 하자고 했을 때, 탁구채로 탁구공을 깨버릴 듯이 휘둘렀다. 다른 사람이란 그 남자가 부러워 어둠 속에서 자취집 바람벽에 마구 주먹질을 해댔다. 직원들과 나이트클럽에 가서 술 마시며 춤을 추다 그녀 생각이 간절하여 무심결에 어느 여직원에게 키스하자고 제의했을 때, 내 입술을 넙죽 받아드리는 바람에 ‘술김에’ 라는 쪽지를 다음날 건네주고 며칠 휴가를 낼 수 밖에 없었다.

성민주, 어느 날 속으로 당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당신은 두 손을 허리 가까이에 여민 채, 주름진 엷은 분홍색 원피스에 하늘색 허리띠를 매고, 예의 왼쪽을 약간 저는 듯한 걸음걸이를 하며 거짓말처럼 내 앞에 나타났었죠.

“안녕하세요”란 당신의 인사는 봄 햇살의 파동과 함께 주위의 꽃과 풀들의 귀를 쫑긋 세워 싱그러워지고 환하게 짓는 미소는 투명한 날개의 나비가 되어 내 가슴으로 마구마구 날아들었죠.

한 줄기 바람이 은사시 나무의 잎들을 뒤집으며 반짝이게 하더니, 어느새 당신의 복숭아뼈를 가리고 있는 신발 끈을 헤집고 당신의 무릎을 거쳐 옷 끝 주름으로 스며들어 치마폭을 흔들어대고, 그 펄럭임에 부신 눈을 가리자 당신은 여민 손을 펴고 내게 다가왔죠.

“또 무슨 생각이 그리 많았을까?”하는 말을 하며 당신이 내 어깨에 붙어 있는 마른 잔디 몇 개를 떼어낼 때 당신의 숨결이 내 귀를 거쳐 오른 뺨으로 내려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고요.

성민주. 나는 당신의 먹는 표정까지 사랑했습니다. 아니 당신의 도시락까지. 당신이 식사 후에 마시는 물이 꿀꺽 꿀꺽 넘어가는 목젖까지 사랑했습니다.

나의 그녀에 대한 방황은 1년 가까이 계속된 것 같다. 모처럼 고향에 내려와 친구들과 재화를 반기면서도 그녀의 집 앞을 서성거리는 경우가 여럿 있었고, 한 번인가 그녀가 지친 모습으로 현관문을 여는 모습을 보았으나 그녀의 행복을 건드릴까봐 그냥 돌아서는 참담함도 있었다.

잊자. 잊기로 하며 마음을 정리하자 다시 봄이 오고, 키스를 했던 여직원의 모습이 예쁘게 보이기 시작했을 때, 친한 친구 한 명이 내가 보고 싶다며 무작정 나를 찾아왔다. 고향의 모습과 아는 이의 소식이 한꺼번에 친구의 긴 이야기로 펼쳐지고, 나는 마지막에 그녀의 편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듣고 난 친구의 모습은 한참을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미친 자식아. 예전에 글까지 썼다는 놈이 편지 내용을 그렇게 받아드렸단 말이냐? 내가 보기에는 민주가 가리키는 ‘다른 사람’은 바로 너란 말이야.”

[약력]
저자 박석구
영암 군서면 출신
2011년 에세이스트 수필 등단
2014년 에세이스트 베스트 10
2015년 문학 에스프리 시 등단
현)에세이스트작가회의 홍보위원장
영암일보 yailbo@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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