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이 내린 최고의 은퇴선물 궤장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2년 01월 06일(목) 1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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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장 (几杖)이란, 왕이 나라에 공이 많은 퇴직하는 늙은 신하에게 주는 의자와 지팡이다.
이 궤장을 처음으로 받은 사람은, 664년 신라 문무왕으로부터 하사받은 태대각간 김유신 장군이다. 고려 시대는 현종 때 귀주대첩의 문하시중 강감찬 장군과 뒤를 이어 해동공자 최충과 무신 최충헌이 하사받았으며 이씨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함흥차사 중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영의정을 지낸 성석린이 처음으로 하사받았다. 성석린은 그 유명한 함흥차사 길에서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개국공신이다. 1902년 고종 때 의정 윤용선이 마지막 받았다.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이씨 조선 500년 동안 궤장을 받은 사람은 총 61명이 등장하는데 궤장은 반드시 70세 이상의 연로한 대신들 중 깨끗하고 명예롭게 복무한 신하들에게만 주어졌으며 궤는 양쪽 끝이 조금 높고 가운데는 둥글고 오목한 의자였다. 지팡이의 머리는 비둘기 모양으로 장식하였으며 나라에서 궤장의 하사는 연로한 대신을 극히 우대하는 예법의 하나로서 이 제도를 경국대전에 법제화하고 국조오례의에도 궤장의 시행과 규격을 정해 놓았다.
벼슬이 1품인 찬성 이상에 이르고 나이가 70세 이상으로서 국가의 크고 작은 일 때문에 퇴직시킬 수 없는 신하를 예조에서 왕에게 보고 후 엄격한 심사 끝에 궤장을 내리게 하였다.
궤장을 하사할 때는 잔치를 크게 베풀어주었으므로 더욱 큰 영광에. 가문의 큰 자랑이기도 하였다. 궤는 평상시에는 접어 두었다가 앉을 때만 펴게 만든 의자로 등받이는 자작나무로 만들었고 안석은 흑염소 가죽이었으며 지팡이는 비둘기 머리와 국화가 조각되어 있고 끝부분에 무쇠 삽이 달려 있다.
당시 70세까지 장수를 하는 것만도 무척 힘들었는데 당쟁이 치열한 세태 속에서 벼슬을 그 나이까지 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었는데 궤장까지 하사받았으니 그 기쁨은 오죽하였겠는가. 궤장을 처음 받은 김유신은 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후손으로 김해 김씨의 중시조다. 할아버지 김무력과 아버지 김서현의 후광으로 일찍이 화랑의 우두머리 풍월주가 되었고 신분 상승을 위해 두 여동생을 신라 왕족 무열왕 김춘추에게 받치는 꼼수도 부렸다.
마침내 매제인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외조카인 문무왕 김법민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큰 공을 세웠다. 나이 79세에 사망하여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흥무왕에 봉해졌다.
고려 시대에는 강감찬. 최충. 최충헌이 궤장을 받았다는 옅은 기록뿐이다.
이씨 조선이 건국하고 궤장에 대한 기록이 쏟아지는데 궤장에 관계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세종조 1420년 2월 26일 예조에서 상소하기를, “나이 늙은 대신에게 궤장을 주는 법이 육전에 실려 있는데, 책임관이 아직 실시하지 아니하오니, 노인을 공경하는 뜻에 어긋납니다. 육전에 따라서 실시하소서.” 하니 세종은 1421년 1월 16일 "나라에 공로가 있는 70세 이상의 원로대신에게 내려주던 안석과 지팡이인 궤장을 84세의 창녕 부원군 성석린에게 하사하였다."라는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세종은 이후에도 유창. 류관. 조견. 류정현. 맹사성. 민여익. 권진. 황희. 이정간. 한창수. 오승. 안석. 허조. 송거신. 조말생. 신개. 이명덕. 하연. 최윤덕 등 총 20명의 신하들에게 궤장을 내렸는데 특기할 사실은 세종 때야말로 관리들이 가장 청렴했고 열심히 근무했다고 한다.
어찌나 억세게 근무를 시켰던지 집현전 학자들이나 중앙의 관료들은 지방직을 선호했으며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다 한다. 일단 보직이 한번 주어지면 쉽사리 이동이 없는 전문가 양성 코드인사정책으로 고을 수령도 임기 내에는 쉽게 바뀌지 않았으며 뇌물수수 등 부패한 관리가 아니면 파면되지 않는 부민고소 금지법을 마련해 관리들이 소신껏 일하도록 보호해 주기도 하였다.
즉 세종은 신하들을 능력대로 사정없이 일을 시켰고 퇴직 후에는 그거에 맞는 보상을 해주는 현명한 군주 였던 것이다.
이처럼 임금과 신하들이 혼연일체가 되었기에 조선 초기에 '월인천강'의 태평성대를 펼친 성군이 되었다.
문종 때는 이백강. 최사의. 이천.
단종 때는 김종서가 하사받았고
세조 때는 정인지. 최유. 이변. 정창손. 성봉조. 한명회. 심회. 이극배에 연산군 때는 윤필상. 노사신. 정문형. 손순효. 어세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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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때는 노수신. 인조 때는 이원익. 현종 때는 이경석. 숙종 때는 허목. 영조 때는 박필성. 헌종 때는 김이양. 민치구. 고종 때는 심순택. 조병세. 윤용선이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특이한 인물로는 현종 때 궤장을 하사받은 이경석이다. 백헌 이경석은 충청도 제천 출신의 당대 명필에 문장가였다. 18세에 진사가 되고 문과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으로 1637년 11월 27일 '대청황제 공덕비'인 삼전도 비문을 초안한 인물이다. 강화유수 이경직의 동생이며 좌의정 김상헌의 문인으로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정 1품 영의정이 되었고 효종이 북벌을 도모하자 한때는 위리안치되었고 삼전도 비문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송시열 등 노론당들에게 온갖 멸시와 수모를 당했다.
예나 제나 입으로만 충성한 채 백성들의 안위는 전혀 돌보지 않은 채 쓸데없는 명분만 내세운 존명배청의 사대주의와 성리학에만 몰입되어 실행치도 못할 북벌을 운운하며 그 누구도 비문 작성을 회피해 당대의 명문가인 이경석에게 그 불똥이 떨어진 것이다.
몇 날을 눈물로 지새다가 할 수 없이 붓을 들었기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 한 많은 충신이었다.
권력의 최측근으로 대통령을 보필하는 고위직에 올라 정보를 이용하여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축척해 끝까지 버티다가 끝내 부를 지키기 위해 벼슬까지 포기한 못된 자들과 눈만 뜨면 좌빨타령을 일삼으며 국정의 발목을 잡아 개혁을 막는 요즘의 정치판에 백헌 이경석 같은 올곧은 정치가의 등장을 학수고대해 본다.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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