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보정과 영보농민운동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2년 02월 09일(수) 11:23
월봉 김오준
시인 / 광주문인협회 이사
영암 덕진 영보정은 연촌 최덕지 선생이 지은 정자로 알려졌다. 연촌은 담양부사를 지내고 예문관 직제학에 올랐으나 바로 사직 후 영암의 영보촌에 내려가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정진하면서 사위 신후경과 함께 영보정을 지었다 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한석봉의 쓴 현판이 보인다.

연촌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학식이 높고 행동이 단정하여 집현전 학자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음이 문헌에 등장한다. 우리 영암의 선비정신과 민족운동의 뿌리는 연촌이 그 시발점이며 존양사와 영보정이다. 계유정난의 잘못된 역사를 학문과 행동으로 과감히 항거한 연촌의 올곧은 정신이 영암의 후세들에게 배었기 때문에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의로움을 행동으로 실천한 우리 영암의 선열들이 자랑스러운 것이다.

혈연. 학연으로 얽혀진 소론 계열의 영암의 선비들은 영보계와 대동계를 규합해 향촌질서를 바로잡고 구국운동의 기치를 들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운동을 일으킨 양달사 장군의 뒤를 이어 1907년 정미 의병운동도 국사봉을 근거지로 한 영암 출신들이 주도했던 것이다. 고종의 칙령에 의거 의병 해산령과 일제의 잔인한 전라도 대토벌 작전으로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몸 바쳤으며 은거했던 반촌의 유생들은 신학문을 공부시키기 위해 서울. 광주. 일본 등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리하여 신학문을 배운 엘리트들은 당시 각광을 받았던 레닌의 사회주의 사상이 일제로부터 벗어나는 독립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단편적 판단 아래 사회주의 운동에 심취해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해방 후 맥아더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악랄했던 친일파들의 만행으로 6.25 남북 전쟁 때는 일부 세력들은 사회주의에 물들어 좌익의 빨치산이 되어 좌우 대립이 극에 달해 희생자가 늘어났다. 신북의 모산리. 군서의 구림리. 덕진의 영보리는 '영암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주의 운동에 물든 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대부분 양반가의 자녀들로 유학을 해 신학문을 공부했으나 시대가 그들을 표용 치 못해 빛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

영보정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구국정신을 교육한 장소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1921년에 이곳에 영보 학원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항일구국정신을 배양했기에 1931년의 '형제봉 만세운동'이 영보정에서 태동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1926년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일제에 의해 해방운동 영암중앙부가 해체되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곽명수. 최판옥이 영암지방 사회운동을 규합하고자 광주학생독립운동 참여자들의 석방 시기를 노리다 영암 영보 출신의 동경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던 김판권이 1931년 7월 고향으로 귀국해 최판옥, 곽명수 등 영암지역 청년들과 교류하면서 8월 사회주의 운동 조직체를 재건했다. 이들은 보통학교 동창회와 마을 청년회, 야학회, 소작상조회의 조직을 활용하며 '적색노동조합'을 창설한다. 이들은 사회주의 이론을 주입했고,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참여자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신파극 연극과 강습해도 열었다. 민족의식을 계몽하고 농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소작인들의 의식과 행동강령도 교육했다.

드디어 1932년 4월 영암지역의 사회운동을 통합적으로 전개코자 '영암 공산주의자 협회'가 결성되었다. 영암지역의 농민, 노동자, 청년, 등 다양한 계층들을 참여시킨 채 지주들의 소작권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지주와 마름이 소작인을 상대로 소작권을 장난치는 사태가 발발하자 청년 회원들이 문제의 토지를 공동 경작을 함으로써, 경작지를 빼앗긴 농민에게 되찾아주기도 했다.

마침내 1932년 6월 4일 김판권, 최판옥은 영암지역의 청년 70여 명과 함께 형제봉에서 봉기를 했다. 최판옥과 김판권은 청년들에게 현재 국제정세를 설명하고, 지주의 횡포에 맞설 것을 독려했다. 형제봉을 내려온 참여자들은 소작권 쟁취 투쟁을 일제히 전개했다. 부당한 소작권 이전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히며 소작권 이전의 부당성을 규탄하며 무단으로 이전받은 신소작인들과 충돌하며 소작쟁의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가두시위와 행렬을 벌렸다. 지주의 집에 찾아가 토지제도의 부당성을 성토하며 “일본인은 우리의 논과 밭을 내놓아라”, “마름의 횡포를 지양하라”, “일본인들은 이 땅에서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깜짝 놀란 일제경찰대가 출동하여 검거가 진행되면서 시위에 참여한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검거된 인원 중에서 재판에 회부 된 숫자는 70여 명에 달했고 실형이나 벌금형에 처해졌다.

90여 년의 세월이 지난 2021년까지도 항쟁의 주모자들이 사회주의 좌익사상자들이라고 군사정권과 보수정권에서 포상을 거부해 오다 만시지탄으로 문재인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40여 명을 포상해 국가유공자로 선정했다. 이는 참으로 다행스럽고 차제에 우리 영암군에서도 이를 계기로 의병운동 현창사업 및 영보정 사건을 재조명하여 후세교육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약력]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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