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처 에세이 '사랑의 방명록'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2년 07월 06일(수) 1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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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면 반기는 자와 못마땅해 하는 자, 웃는 자와 찡그린 자, 희망을 북돋는 자와 경멸하는 자, 알랑대는 자와 욕하는 자, 그리고 믿음과 회의, 희망이나 절망들과 이별하였다.
밤, 마루에 앉아서 지나간 연민들을 가라앉히며 감나무 잎사귀가 서로 마주치고 댓잎들이 부딪히며 기우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이 다가왔을 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은 마루를 내려와 약간 슬픈 듯한 표정을 짓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만에 보는 별인가, 별들은 검푸른 하늘에 내 무수한 여정의 생처럼 더러는 뭉쳐서 더러는 외로이 홀로 빛나고 있었다. 평화를 위장한 반딧불이처럼, 순결을 위장한 안개꽃처럼, 쓸쓸하구나.
내가 담배를 피워 물고 검은 어둠 속으로 연기를 내뿜었을 때, 동네 개들이 갑자기 짖기 시작했다. 어느 누군가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술에 취했든 가벼운 여행에서 돌아왔든 그 자는 집이 있어 어느 골목으로 접어드는 구나.
문득, 그래도 나도 집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 해 겨울은 흰 입김 길게 뿜으며 서리로 색을 잃은 황토 밭길을 손 비비며 자주 가곤 했다. 가면서 무수히 다짐을 하였다. 녹아도 내일 다시 오는 서리가 되자, 서리로 잎 떨군 생채기를 보듬는 저 참나무가 되자.
마당에는 벌써 풀들이 자기 영역을 조금씩 차지하고 점점 주변을 넓혀가고 있었다. 쑥, 쇠비름, 질경이, 씀바귀, 민들레, 댈싸리 등이 햇살이 돌아가는 궤적을 따라 쳐다보며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나는 평생을 이 동네에서 투정부리지 않고 살아왔고 살아가는 초등학교 동창에게서, 고추와 애호박, 상추와 열무, 들깨와 참깨, 오이와 가지 씨를 얻어와 집 주변 밭에다 종류별로 이랑을 내어 한 구멍에 세 알씩 심었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한 알은 썩더라도, 한 알은 새의 먹이가 되더라도, 한 알은 싹을 틔울 것이라고 했다.
나는 날마다 마당을 가로질러 밭 주변을 살피며 돌보기를 시작했다. 즉, 마당에서 자라고 있는 일명 잡초라고 불리는 풀들은 손으로 뽑거나 낫으로 베어 내고, 밭에서 자라는 일명 채소라고 부르는 작물들은 퇴비도 주고 물을 뿌려주면서 일방적인 편애로 나날을 보냈다.
바람과 햇살은 평등하였다. 비와 시간도 그들에겐 평등하였다.
하지만 상처를 입은 잡초는 마당의 돌 틈에서 헉헉거렸고, 더 이상 상처를 원하지 않는 나처럼 채소들은 두 잎이 세 잎이 되고 세 잎이 나중엔 무성하게 되어, 내 보기에도 좋은 푸른 작물이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계절이 넘게 육신을 부식시키며 꼼짝 않는 나에게, 광주의 친구들은 내 무심한 처사를 원망하며 만남을 닦달하였다. 그리하여 겨우내 모아두었던 쓸쓸함을 내던지고, 친구들과 광주에서 며칠을 이야기하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다가, 반가움이 바닥나자 시골집으로 다시 내려왔다.
산수유 꽃은 이미 졌고 동백꽃와 매화는 시들어가고 어느새 벗꽃은 활짝 피어 골목이 환했다. 친구가 쓸쓸함을 다독거리라고 내게 준, 이제야 아장거리며 돌아다녔던 황구 옥금이는, 옆 집 당숙모에게 맡겨두었는데, 어느 새 뭉실뭉실해진 꼬리를 반갑다고 어떻게 흔들어대는지 몇 번을 쓰러지며 내게 안겨왔다.
허나 그렇게 정성을 다한 채소들을 살피러 내가 한걸음에 다가갔을 때, 그것들은 처참한 몰골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잎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체 그들은 골다공증에 걸린 것처럼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고, 몇 모금의 물을 기다리다 이미 지쳤는지 그나마 축축 늘어져, 줄기의 끝은 기아에 굶주린 모습으로 원망의 눈초리를 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바닥에는 젊디젊은 바래기들이 융단을 깔아 놓은 듯 새파랗게 잎들을 세우고 점령해버린 상태였다.
아, 그것은 걸어 온 내 삶, 지친 내 상처의 그림자였다.
내가 세월을 연약하게 살았구나. 내가 그러면서 다른 이의 보호 속에서 살았구나. 내가 모든 것을 너무 쉽게 보면서 살았구나.
"아마, 민달팽이일 거야. 농약을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먹지도 못해."
상심의 입술을 깨물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러 찾아간 친구가 당연한 듯 내뱉은 말이었다.
마당의 돌 틈에서 내 손아귀에서 살아남았던 잡초들은 나에게 입은 상처가 아직 갈색의 흉터로 군데군데 남아있었지만 잎들은 더 넓어지고 싱싱하였다. 그래, 잡초와 싸우면서 잡초처럼 살자.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영암일보 yailbo@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