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침탈의 원흉 요시다 쇼인과 아베의 조상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2년 08월 22일(월) 16: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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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인은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라며 존왕양이 운동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요시다 쇼인은 조선을 찬탈하기 위한 '정한론'과 터무니없는 '대동아공영론'을 주창해 조선 침탈의 밑그림을 그렸고 일본이 제국주의로 굴기하는데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고향 야마구지현에 '송하학숙'을 세워 조선 침탈을 주도한 주역인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등을 그의 문하에서 배출했다. 침탈 과정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사건들을 주도한 인물들 또한 거의 요시다 쇼인에게 학습 받은 야마구지현 출신들이다.
얼마 전 총살당한 극우파 아베 신조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던 존재가 바로 요시다 쇼인이다.
요시다 쇼인은 1830년 조슈 번(야마구치 현) 하급 무사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군사학을 전공한 숙부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숙부에게 병법을 배웠고, 11세 때에는 번주에게 병법을 강의할 정도로 천재적 재능을 보인 이론가로 성장했다. 18세가 되자 스스로 독립해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1850년 규슈에 가서 새로운 병법을 연구했으며 1851년에는 에도에서 사쿠마 쇼단에게 서양 학문과 군사학을 새롭게 배웠다.
1853년 7월 에도 항의 미국 동인도 함대 소속 페리 제독이 이끄는 4척의 흑선이 나타나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는 국서를 전달한 후 떠났고, 다음 해 다시 요코하마에 상륙했다. 목재로 건조한 선박이나 유럽의 상선만 보았던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대형 대포를 장착한 증기선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충격이었다.
1년 후 미국에 의해 강제로 개항된 일본은 서양 문물이 급격히 유입되면서 근대 국가의 틀을 차근차근 갖춰 나갔다. 변화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변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변화는 요시다 쇼인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고 이 일을 계기로 요시다 쇼인은 규슈 등 일본 전국을 유람하면서 일본의 현실을 살펴보고 견문을 넓혔다.
특히 미토번을 방문하여 개화의 물결에 쉽게 적응하며 새롭게 대응하는 학문이 미토학이라고 단정하며 수용했다. 쇼인은 정체되어 있는 막부 체제 아래에서는 결코 선진화된 구미 열강들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고, '배도 대포도 일본은 미국의 적수가 안 된다'라며 일본의 근대화를 부채질했고 민중들을 계도했다. 서구의 신문물과 정치 체제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유럽이나 구미 열강에 대항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요시다 쇼인은 신속히 서양의 뛰어난 군사학과 신무기를 일본에 도입할 것과 일본의 인재들을 영국과 미국 등에 유학시켜 미래를 대비해 키워나가야 한다는 정책을 입안해 막부에 강력히 건의했다.
그러나 막부는 쇼인의 주장에 개의치 아니했으며 위기의식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쇼인은 또다시 '장급 사언'(將及私言)을 막부에 제출해 다시 한번 자신의 견해를 진언했다.
이후 1854년 페리 함대의 압박으로 미·일 화친조약이 체결되자 시모다 항에 정박 중이던 미군 함선에 승선하여 밀항을 시도하다 쇼인은 감옥에 수감되었다.
14개월간 감옥에서 생활하면서 유수록(幽囚錄)을 써 밀항의 이유와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일본이 살아남을 길은 강력한 무력을 갖추어 주변의 약소국들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최초로 정한론과 대동아공영을 설계해 일본을 위기에서 구하려면 막 번체제로는 절대로 안되며, 일본이 단결하고, 조속히 무력을 갖추어 홋카이도를 제후로 봉하고, 오키나와를 다른 번과 동등하게 취급하며, 조선을 공격해 인질과 공물을 바치게 한 후 만주와 대만, 루손까지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와 미국의 강화가 이루어진 현 상황에서는 구미 열강과의 마찰을 절대로 피하고, 서구식 신무기를 도입해 구미 열강과의 교역에서 입은 손실을 만주와 조선을 침략해 시급히 복구해야 된다고 했다.
쇼인은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고향 집에서 유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학문을 닦고, 지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국제정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의 위기를 구할 방법을 강구했다. 감옥에서는 죄수들을 모아 놓고 현재 일본의 위기와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고 출옥 후 고향집에 송하 학숙을 세워 젊은 개화 지도자를 길러냈다.
신분과 계급에 관계없이 제자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는데, 3년 동안 이곳에서 배출된 인물들이 메이지 정부의 요직을 거의 차지했으며 일본 정계는 물론 국제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을 배출했다. 서양의 문물을 배워 일본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는 쇼인의 주장대로 일본은 서양의 직조술, 대포 제조술, 조선술, 육군 군제 등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근대 일본을 개화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1858년 막부는 미·일 수호 통상조약도 체결했다. 이때 일본 전역에서 반막부 운동이 일어났다. 막부는 이들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해 100여 명 지사들을 감옥에 가두고 사형시켰는데, 이때 쇼인도 체포되었다. 쇼인은 서양 오랑캐에게 일본이 굴복한 것은 국체가 바로 서지 않았기 때문으로, 천황의 친정이 이루어지면 국체가 온전케 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쇼인은 에도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29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는 비록 짧은 생을 살았으나 이토 히로부미,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등 그의 문하에서 세 명의 총리와 여섯 명의 장관이 배출되는 등 메이지 유신의 정치 지도자들이 탄생해 그의 사상을 실현시켰으며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정미 7조약을 체결한 후 쇼인의 무덤에 사실을 고하며 스승의 선견지명을 기렸다. 그 후 2006년, 총리가 된 아베 신조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쇼인을 꼽을 정도로 쇼인이 일본의 근대화에 끼친 영향력은 지대했고 그의 위패는 야스쿠니 신사 신위 제1호가 되었다.
아베 가문의 조선 침탈의 과정을 살펴보자.
1894년 동학 혁명군이 봉기해 관군을 격파하고 이 씨 왕조의 본향 전주성을 점령한다.
혁명군들에게 양반들의 기득권을 양보하기 싫었던 고종과 민비는 어리석게도 청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했고 청이 아산에 상륙하자 사전에 정보를 탐지한 일본군도 재빨리 제물포항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온다.
이때 한양 진주군 사령관이 아베 신조의 고조부 요시마사 육군 소장이다.
조선의 경복궁을 접수한 요시마사는 야마구치 하기시의 송하 학숙 출신이었다. 그는 쇼인에게 정한론을 배웠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선 그 어떤 일도 자행하는 철두철미한 쪽바리였다.
요시마사는 경복궁에 4천 명을 주둔시키며 전열을 가다듬은 후 정예군을 이끌고 아산으로 내려가 7월 29일 청나라 엽지 초군 3,500명을 공격한다. 갑자기 기습을 당한 청군은 500명의 전사자와 300명의 포로를 내고 패주했다.
당시 세계 최강의 일본군의 피해는 겨우 80명으로 전투력에서 크게 차이가 났다. 그보다 앞서 7월 25일 일본 제1 유격대 요시노, 아키 츠시마가 이끌었던 나니와호는 아산만 풍도에 정박한 청나라 군함 광을 호를 격침시켰고 청의 제원호는 도망을 쳤다.
큰 전공을 세운 나니와호 함장은 사쓰마 출신 도고 제독으로 훗날 러일전쟁 시 대마도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를 전멸시킨 일본의 해군 영웅이다.
한편, 요시마사가 지휘하는 일본 육군은 평양으로 진격해 9월 15일 15,000 명의 청군을 공격, 평양의 현무문을 부수고 평양성을 함락 시킨다.
청군은 평양에서 2,000명의 전사자와 600명의 포로를 내고 패주하자 압록강을 건너 만주까지 진격했다.
또한 사쓰마 출신 이토 스케 유키가 이끄는 일본 해군도 북상해 9월 17일 황해해전에서 12척의 일본 군함으로 14척의 청나라 북양함대를 속사포로 공격해 청나라 북양함대는 5척이 침몰하고 6척이 파손된 채 여순으로 달아나 버렸다.
쇼인의 제자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지휘하는 1군도 압록강을 도하하고, 사쓰마 번 오오야마 이와오의 2군은 여순을 점령한다.
요시다 쇼인의 수제자로 조슈 번 출신 총리 이토 히로부미가 시모노세키에서 이홍장과 조약을 체결해 막대한 전리품을 챙긴다.
이후 일본은 각본대로 조선을 차근차근 병탄해 식민통치에 들어갔다.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항복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야마구지현 출신, 쇼인의 제자들이 통치했고 더 식상한 것은 아베의 가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마지막 조선 총독이 아베 노부유키로 1944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여 패전하자 가짜 할복자살을 기도해 살아남았고 조선 점령군 사령관 미국 하지 중장에게 항복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일본은 패했지만 그렇다고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우린 식민지 교육을 시켰으므로 장담하건대 차후 100년 안에는 조선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찬란했던 조선 문명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것이며 서로 이간질하고 싸우는 노예적 삶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나 아베는 다시 돌아온다.“라고.
아베 신조의 조부는 야마구치현에서 중의원 의원을 지낸 아베 간인데 도조 히데키의 군국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반골 기질의 비둘기파 정치인 이었다.
1942년 도조 히데키 내각이 전쟁에 비협조적 후보를 낙선시키려고 했던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일본 육사 생도 박정희와도 친분이 두터웠던 인물이었다.
외조부는 박정희 중위처럼 만주국에 근무했던 전범 기시 노부스케다. 외종조부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협정을 체결한 사토 에이사쿠로 역시 야마모토 출신으로 일본 총리를 지냈다.
아베의 부친은 총리 물망에 오르내렸으나 병사한 외무대신 아베 신타로다.
2013년 8월 13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도쿄 야스쿠니 신사의 원조인 하기시 마쓰모토촌에 있는 쇼인의 신사를 참배했다. 쇼인 신사는 쇼인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처럼 요시다 쇼인의 일관된 교육은 요시마사와 신사쿠 등 제자들로 이어지고 기시 노부스케와 사또 에이사쿠. 아베 간을 거쳐 전 일본 총리 "아베 신조"로 계승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도 종군 위안부와 독도 문제를 제멋대로 해석하며 미국을 등에 업고 까불어 대고 있는 것이다.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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