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 제자리찾기 김종수 목사의 ‘하늘샘물 흐르는 곳에’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2년 10월 05일(수) 16:47 |
|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그려진 아기 에수 그림을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아기를 아기답게 그린 것이다.
아무리 아기라도 예수니까 거룩하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중세의 사고라면, 예수라도 아기니까 아기는 아기다워야 한다는 것이 르네상스 시대의 사고이다.
중세가 외적인 잣대를 가지고 사건이나 사람, 사물을 재려고 했다면, 르네상스 시대는 내적인 잣대로, 즉 사람이나 사건, 사물이 그것다운 것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림만이 아니다. 문학에 있어서는 페트라르카를 시작으로,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이라는 작품을 통해 중세의 윤리나 도덕이라는 외적 잣대를 거부하고 ‘그것다운’, ‘그것에 어울리는’ 내적 잣대를 사용하였다. 과학에 있어서 갈릴레이는 평균 속도만을 속도라고 여긴 지난 이론을 무너뜨리고 달리고 있는 그 자체의 속도를 계산할 수 있는 ‘가속도’를 찾아내었다.
속도다운 속도를 찾아낸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도 발라는 과거의 역사 서술이 이차적인 사료를 역사로 오인하는 것을 막고, 그 이차 서로를 검증하는 일차 사료가 있는가를 보고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료다운 사료인가를 검증한 것이다.
이러한 르네상스 사조 한가운데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긴 마르틴 루터는 당시의 교황청과 교회에 대해 ‘하나님을 하난님답게 하라.’고 외쳤다. 당시 하나님의 자리에 교황이 앉아 있었고, 하나님 말씀의 자리에 교회법이 앉아 있었다. 교황은 오류가 없다는 교황무오설과 인간이 만든 것임에도 절대화된 교회법에 대한 저항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자리와 인간의 자리를 회복하는 신앙 운동이었다. 하나님다운 하나님, 인간다운 인간의 삶을 회복하는 개혁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의 혁명이 서구에서는 14세기 말부터 일어났지만 동양에서는 이미 아주 오래 전인 기원전 5세기에 공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공자의 사상을 한 마디로 말하면 ‘仁(인)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질 仁(인)이라고 말하지만 글자 모습은 사람이 둘인 골이다. 이것은 사람이 둘이라는 말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仁(인)은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말이다.
공자는 仁(인)에 대해 ‘君君臣臣(군군신신)’, ‘父父子子(부부자자)’라고 설명하였다. 즉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며,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고 했다. 다른 외적인 기준을 가지고 설명하지 않고 그것 자체로 설명했다. 이것이 바로 어진 사람이라는 말이다.
공자는 자기소개를 할 때 누구의 아들이니, 그 사돈의 팔촌이 어떤 벼슬을 했다고 말하지 말라고, ‘나는 나’라고 소개하라고 했다. 그리고 ‘자리가 아니면 앉지 말라’고 했으며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다. 즉 나는 나다워야 하며, 자리는 자리다워야 하며, 길은 길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올해로 489년이 된다. 인간을 인간의 자리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로 회복시키기 위해 일어난 신교는 이제 스스로가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목회자 자신이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의 성직자들이 그들 스스로를 신격화시켜 부패하였듯이 오늘 우리 개신교의 목회자들이 같은 전철을 밟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교회의 성장은 분명 목회자들의 지위를 올려놓았다. 어느 교회에서는 신격화된 목회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목회자는 여전히 목회자다. 사람들이 올려놓았다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하건 목회자에게는 목회자다운 자리가 있다.
요한복음 2장 23절 이하를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높인다고 높여지고, 낮춘다고 낮아지지 앉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다운 예수님의 자리가 있을 뿐이다.
목회자는 있는 그대로의 복음을 전하고 목회를 하면 된다.
사람들을 끌기 위해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말씀을 전해주는 장사꾼이어서는 안 된다. 목회자에게는 사람들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하나님의 말슴이라는 메뉴밖에 없다. 사람들의 주문에 따라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게 좋게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이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요한복음 6장 15절을 보면 오병이어의 사건 이후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했다. 그 때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떠나셨다. 사람들의 인기에 부응하지 않았다. 산에서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을 것이다. 거기가 에수님다운 자리이다. 목회자의 자리는 기를 돌아보며 말씀을 받고 전하는 자리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총회장이 되기 위해 금품을 살포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사실이 아니기를 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람들의 표를 얻기 위해 많은 돈까지 쓰는 부패한 정치인과 무엇이 다른가? 정치인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데 하물며 목회자야 말하나마나이다.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노회나 총회는 다른 일반 세상의 회의와 다르다. 사람의 의견을 묻는다면 큰 착각이다. 노회나 총회, 교회의 제직회, 당회는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는 모임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곳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전하는 자리, 그것이 목회자의 자리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에는 세 가지 구호가 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이다.
사람들을 끌기 위한 사람들의 지혜라면 은혜란 없다. 공적만이 있을 뿐이다.
일부 대형 교회에서 나타나는 목회자의 횡령, 교회 세습 등의 문제는 그만한 교회를 이룬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기보다는 자신의 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서 아닌가? 그렇기에 교회가 사유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두가 목회자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해서이다. 혹 목회자들이 목회의 자리 외에 하나님아닌 사람이 부러워하는 또 다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가?
바울이 말한 대로 목회자에게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신갑주 외에 더 입을 것이 없다. 아직 무슨 옷들을 더 끼어 입으려 하는가? 오늘의 종교개혁은 바로 그런 옷들을 벗어 던지는 것이다. 그래야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영암일보 yailbo@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