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궁궐 경복궁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2년 10월 05일(수) 17:18
김오준
논설주간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1의 법궁으로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태종 이방원과 세종, ,숙종에 의해 중축되었다.
불행히도 1592년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275년이 지나고 고종 때인 1867년 흥선군 이하응에 의해 60년 세도정치로 실추된 왕권 확립 차원 하에 중건되었다.


경복궁 건축의 책임자는 궁궐조성도감 판사인 심덕부였으며 실질적으로 경복궁 건축을 한 인물은 일찌기 고려 때 원나라에 끌려갔다가 공민왕과 함께 귀국한 환관으로 고려말 혼란의 시기에 태조 이성계쪽으로 줄을 섰던 판내시부사 겸 선공감을 맡았던 김사행이었다.
김사행은 본관이 김해김씨로 도성 및 정원 공사 전문 건축에 조예가 깊고 재주가 뛰어났으나 물욕이 많아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궁궐 축성의 재주는 그 누구도 당할자가 없어 궁궐조성의 실질적 책임자가 되었다.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은 그 당시 최고 정권의 실권자로서 경복궁의 위치를 잡는 데 관여한 것과 경복궁 및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등 주요 전각들의 이름을 지었다.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따라서 ‘경복'은 유교 경전인 시경에 나오는 ‘군자만년 개이경복’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말이며. 그 뜻은 ‘군자여, 만년토록 복을 누리소서.’라는 군자, 즉 임금인 태조 이성계가 영원토록 복을 누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더 나아가 조선이 오래도록 큰 복을 누리라는 뜻으로 경복궁이라고 이름을 한 것이다.


경복궁의 4대문과 궐의 이름과 배치도 중국의 자금성처럼 모두 유교의 경전 주례에서 따온 것이며 특히 종묘와 사직을 중시했다.
성의 축조와 배치도 동서남북으로 나눠 8도의 백성들을 동원해 축성했다.
예를 들면 동쪽인 흥인지문의 성곽은 경상도 백성들을 동원해 투입했고 서쪽인 돈의문의 성곽은 전라도 백성들을 동원해 쌓았다.
그래서 전라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서울의 서쪽 지방에 많이 거주하게 된 까닭도 이때부터라 전한다.


경복궁의 주요 통로의 하나인 흥례문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이며 근정문은 영제교를 건너면 바로 앞에 있는 문으로 왕과 신하가 만나는 조참행사를 행하였던 곳이다.
근정문 뒤편으로 북악산이 보인다.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진행되는 근정전 앞뜰을 조정이라 했고 조선 벼슬아치들의 18 품계석이 있으며 박석을 깔아 홍수와 미끄럼을 방지했다.
북악산은 서울의 경복궁 북쪽에 있는 산으로, 백악산이라고도 한다. 인왕산, 낙산, 남산 등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화강암으로 된 산이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 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왕비의 중궁전,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 안에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여있다.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을 북한산과 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과 일치하도록 서쪽으로 틀어지게 지었는데, 무학대사가 ‘관악산은 화산이기 때문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를 당하게 된다’고 주장하여,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광화문 앞길 130m 구간만 경복궁과 같은 축선으로 배치하고, 그다음부터 종로 입구까지는 도로의 중심이 동쪽으로 최대 39m가량 틀어진 구조로 조성하고, 해태를 만들어 관악산의 화기를 제압하려 하였다.


1399년 정종이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4년 만에 경복궁은 빈 궁전이 되었고, 1405년 태종이 한양 재천도를 단행했는데, 태종은 경복궁을 매우 꺼려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창덕궁을 새로 건설하여 창덕궁에서 거처했다.
태종과 달리 세종은 협소한 창덕궁보다 넓은 경복궁을 선호하여, 상왕 태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창덕궁에 거처했지만, 태종이 승하한 후 세종은 경복궁 공사를 명하여 집권 중기 이후부터는 거의 경복궁에 머물면서 정사를 돌봤다.
근정전은 궁궐의 중심으로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며, 나라의 중요한 의식이 행해졌다.


새해에는 신하들이 임금에게 인사를 올리고, 왕위 즉위식이나 세자 책봉식, 혼례 등도 치러졌으며, 외국에서 온 사신을 맞이한 곳이다.
강녕전은 내전의 왕의 침전으로 부르지만, '왕의 일상적 생활 및 업무공간'이라고 넓게 보아야 한다. 침소는 물론이고 대신들과 일상업무를 보는 집무공간으로도 활용하고 연회를 베풀기도 했으며, 왕실 가족들과 월대를 중심으로 가설무대를 설치하여 궁중가무 등을 관람하기도 했다.
강녕은 서경 홍범구주의 오복중에 셋째인 강녕(康寧)에서 유래되었는데 건강하시라는 뜻이다.


현재 강녕전을 중심으로 부속건물은 동쪽에 연생전과 연길당을, 서쪽에는 경성전과 응지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건물들은 1995년도에 복원된 것으로 교태전과 함께 멀쩡했던 본래의 건물을 일제가 헐어버린 후 창덕궁으로 옮겨진 역사적 아픔도 간직하고 있다.
이 건물의 특이한 점은 용마루가 없는 지붕의 건축양식이다. 경복궁뿐만 아니라 다른 궁궐에도 왕과 왕비의 침전에는 용마루를 두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왕이 주무실 때 하늘의 기운을 받아야 하는데 용마루를 천기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생각한 건 아닌지 추정한다.


교태전은 궁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왕비의 침소인 중궁을 지어 교태전이라 했고, 교태는 천지 음양이 잘 어우러져 왕손을 많이 출산하고 나라의 태평을 이룬다는 뜻이다.
왕과 왕비의 사이가 좋아 많은 자손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으며, 교태전 뒤에는 궁궐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왕비를 위한 공간인 후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에 경복궁의 가장 깊숙한 자리에 세워졌으며, 국왕과 왕비의 거처 및 외교관 접대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때 건청궁 곤녕합에서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된 한 많은 장소이다.
동궁전은 ​경복궁 동쪽에 있는 세자의 궁이라는 의미로 동궁전으로도 불렸으며, 이로 인해 세자를 동궁마마라고도 부른다. 또는 잠저라 칭하기도 했다.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연못의 물은 고여있지 않고 연못 안의 여러 곳에서 샘물이 솟아 나오며, 물이 빠져나가는 곳이 있어 물이 썩지 않았고, 배수시설도 잘 되어있어 호우에도 물이 범람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통치 철학인 성리학을 철저히 지켜 주역을 중시해 역대 왕들을 모시는 문묘와 토지와 곡식의 신을 상징하는 사직단을 가장 먼저 지었으며 좌청룡.우백호.전주작.후현무의 청.백.적.흑색의 깃발을 꽂았으며 12간지에 따른 동서남북의 상징 동물인 토끼.닭.말.쥐의 문양을 새겼다.


4대문 동쪽은 흥인지문,
서쪽은 돈의문, 남쪽은 숭례문, 북쪽은 숙정문이라 칭했다.
북쪽에 위치한 숙정문은 음기와 관련해 나라에 큰 재해가 발생 되었을 때를 제외하곤 문을 폐쇄했다.
나라의 창고는 천.지.현.황으로 표시했었다.


[약력]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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