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의 뿌리를 찾아서 2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2년 11월 23일(수) 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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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 그러하다. 먼저 문학에 있어서 대표 주자인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이라는 소설을 들 수 있다. 데카메론은 세 사람의 젊은 남자와 일곱 사람의 젊은 여자들이 흑사병의 위험을 피해 어느 시골에 가서 머물면서 서로 주고받은 100개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여기서 젊은 여자들이 한 이야기는 중세의 전통적인 통념을 대변하고 있고, 젊은 남자들이 한 이야기는 새 시대의 사상을 대변하고 있다. 데카메론의 이야기 가운데 젊은 남자가 한 이야기 하나를 살펴보면, 어느 마을에 늙은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여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을에 해적들이 쳐들어와서 그 해적들 중 젊고 늠름한 해적이 그 늙은이를 죽이고 젊은 여자를 데리고 가 아내로 삼았다.
중세기의 윤리에 의하면 이 여인은 정조를 지켜야 하고 극한 상황에서도 정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보카치오는 이 소설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이 이야기는 젊은 과부는 젊고 늠름한 해적을 만나 행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만일 중세기의 윤리로 이 소설을 이끌자면 이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끝났어야 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중세의 윤리를 이탈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젊음은 젊음과, 아름다운 여자는 늠름한 남자와 결합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결혼을 외적인 신이 맺어준 것으로 여겨 순결성이니 정조니 하는 외적인 잣대를 가지고 잰다면 어울리지 않는 결혼이 된다는 것이다. 즉 젊음을 젊음과 어울리는 젊음 자체로 말했고, 아름다움은 늠름함과 어울리는 것 자체로 표현한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그것다운 것의 기준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그것다운 내적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적으로 주어진 교리나, 윤리, 도덕을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문학만이 아니라 과학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갈릴레이의 가속도 원리가 그러하다. 가령 어떤 물체가 출발해서 100m을 10초에 갔다고 하자. 이 때 평균 속도는 초당 10m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평균속도이지 달리고 있는 물체의 자체 속도는 아니다. 달리고 있는 물체 자체의 속도를 알기 위하여 발견한 원리가 바로 갈릴레이의 가속도 원리다.
근대에 와서 물리학은 수학의 미분, 즉 시간과 속도의 미분을 통해서 이 가속도 원리를 공식으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과학에서도 외적인 평균 속도로 속도를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속도를 측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물리학에서는 이것을 뉴튼의 제 2법칙, 가속도의 법칙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후대에 산업 혁명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예컨대 중세까지는 차를 외부에서 움직였다. 말이 차를 움직였다. 사람이 말을 움직였다. 마차다. 그러나 르세상스 시대의 사조의 영향을 받은 산업혁명에서는 차를 차 자체가 움직이는 엔진의 개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차 자체가 동력을 갖고 있다.
이어 이런 사조는 철학에서도 일어났다. 철학자 비바스(Vives)의 작품 ‘인간에 관한 우화’에 나오는 내용이다. 로마 신화의 으뜸신인 주피터의 아내인 주노의 생일에 주피터는 그 잔치에 참석한 신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구경거리를 준비했다. 모든 피조물로 무대에서 각각 나름대로의 연기를 하도록 했다. 식물은 식물대로, 동물은 동물대로 하게 했다. 여우는 정말 여우같았다. 늑대는 늑대 같았다. 나무는 나무처럼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 자체 모습 그대로 그것 답게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나왔을 때 신들은 모두 놀랐다. 어쩔 때는 나무처럼 얌전했다. 그러다가도 격노한 사자로 변하기도 하고 탐욕이 가득하고 게걸스러운 늑대로 변하기도 하고 어리석은 당나귀가 되기도 했다. 인간만이 너무도 다양한 연기를 하는 것이다. 신들이 이 인간을 칭찬하기에 주피터는 인간을 신들이 있는 관객석으로 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신들 사이에서 인간은 신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신보다 더 신답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인간만이 어떤 행동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라틴 말로 ‘가면’을 뜻하는 'persona'(페르조나)다. 이것이 후에 영어로 ‘사람’을 뜻하는 'person'이 되었다. 사람은 다중의 품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다움이다.
역사도 예외일 수 없다. 발라가 포문을 열었다. 1922년 영문으로 번역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 대한 로렌초 발라의 논문’이라는 책에 의하면 로마 교황청이 로마시를 소유하고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콘스탄틴 대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할 때 로마시를 교황청에 기증했다고 한다. 그 후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로마시를 교황청에 기증했다는 문서가 작성되었다. 그래서 중세기의 사람들은 로마시가 당연히 교황청의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발라는 큰스탄틴 대제가 로마시를 교황에게 기증했다면 황제의 칙령을 기록한 문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사했는데 그런 기록이 없음을 알아낸 것이다. 그리고 로마시를 교황청에 기증했다는 그 문서는 교황청이 만든 위조문서임을 밝혔다. 말하자면 직접적인 차료인 1차 사료를 중시한 것이다. 후에 1차 자료가 없이 만들어진 2차 자료는 위조라는 발라의 주장이다. ‘그것 다움’의 진실은 직접적인 1차 자료에 근거하므로 이로 인해 교황과 교황청의 권위는 추락하고 만다. 이 책이 처음 독일에서 나왔을 때가 바로 루터가 교황청 정책을 비판하면서 교회에 관한 95개 명제를 공개적으로 제시했던 1517년이다. ‘그것다움’의 1차 자료가 종교 개혁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한 것이다.
[약력]
현 목포산돌교회 목사
현 전남 NCC 회장
현 목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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