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뿌리를 찾아서 3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2년 11월 23일(수) 12:25
김종수 목사
르네상스 시대의 새로운 사조는 회화, 철학, 역사, 과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분야에서 일어났다. 종교개혁은 바로 이 바탕에서 이루어졌다. 개혁의 불은 루터가 지폈다.
루터는 당시의 교황청과 교회에 대해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하라”고 외쳤다. 당시 하나님의 자리에 교황이 앉아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에 교회법이 앉아 있었다. 교황은 오류가 없다는 교황 무오설, 인간이 만든 것임에도 절대화된 교회법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래서 개신교를 '저항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Protestant'(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른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바로 하나님의 자리, 인간의 자리를 회복하는 신앙운동이었다. 하나님다운 하나님, 인간다운 인간의 삶을 회복하는 개혁이었던 것이다.
마틴 루터는 젊어서 법률을 공부하는 중에 급작스런 친구이 죽음의 영향으로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수도사 생활을 하면서 죄의 문제를 가지고 고뇌하였다. 아무리 회개를 해도 죄가 없어지지 않았다. 성당의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올라가며 무릎에 피가 나는 고행의 기도를 해도 죄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회개하면 할수록 자신의 죄가 더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때 마틴 루터가 한 유명한 말이 하나 있다.
“하나님은 내 죄를 용서하셨을지 모르지만 나는 내 죄를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고행의 기도를 하면 할수록 죄가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는 루터의 고백은 진솔한 것이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루터는 그의 죄가 무거워지고 있음을 알았다. 마치 빛에 가까이 가면 그림자가 오히려 더욱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중세의 엄격한 신앙 교리로 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죄를 더욱 짙게 드러나게 할 뿐이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의는 중세기에는 교회법으로 교리화 되었다. 교회법이 최고의 법이 된 것이다. 이것은 바울 시대의 유대교 율법과 같은 것이었다. 바울은 로마서 3장 20절에서 깨달음을 말한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유대교의 율법이 하나님의 의이듯이 중세의 교회법 역시 하나님의 의였다. 중세기의 사고로는 교회법이라는 외적인 법은 인간의 죄를 가중시킬 뿐이었다. 죄를 드러내고 심판을 선고하는 교회법이었다. 여기 구원은 없다. 의가 의답지 않았다. 의가 죄를 인식하게 할 뿐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의란 인간의 죄를 더욱 밝혀주는 꼴이 되는 셈이다. 그러던 중 루터는 어느 날 시편 71편 2절을 묵상하게 되었다.

“주님은 의로우시니, 나를 도우시고, 건져 주십시오. 나에게로 귀를 기울이시고,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여기서 그는 주의 의 즉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의는 분명코 나를 건지는, 구원하는 의임을 깨닫는다. 나를 더 큰 죄인으로 몰아가는, 나를 단죄하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의를 의답게 여기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가리키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는 말도 단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구약성서 레위기 19장 2절도 이를 뒷받침한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루터는 우리의 죄를 드러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에 의해 사죄를 받고 의로워짐으로 구원에 이름을 깨닫는다.
물론 중세기 가톨릭 교회에서도 사람이 회개를 할 때 하나님께서 용서를 선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죄는 용서되었으나 현세의 징벌은 피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그 징벌을 면하기 위한 인간의 선행과 봉사, 금식이나 고행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교회당 건축을 헌금을 하면 벌을 면할 것이라는 면벌증을 써주었던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였다. 1517년 루터가 사는 비텐베르크 근방에 도미니크 수도사인 테첼이라는 사람이 와서 성 베드로 성당을 위해 헌금을 바치면 면벌증을 써주며 동전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순간 그 사람의 죄는 물론 연옥에 있는 가족마저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설교했다.
지금으로부터 505년전 오늘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이 문제를 토론하자고 95개의 질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 앞에 걸어 놨다. 여기서 그는 사죄와 의인은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의에 달려 있는 것이지 교황의 면죄부를 사들임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교황청을 향해 하나님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하라고 외쳤다.
바로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로마 교황청도 사도 바울이 주장한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교황권의 권한 강화와 화려한 성당을 짓는 것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어리석음을 저질렀던 것이다.
교회가 권력화 되면 바로 이런 타락이 나온다. 개신교는 이 종교개혁으로 과연 개혁되었는가? 불행히도 중세기의 가톨릭으로 돌아갔다. 종교개혁가들은 성서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교리를 기반으로한 교회법의 교권이 성서보다 앞섰다. 아니 더 타락했다. 더 이상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다. 권력에 줄을 대느라 정신이 없고 이 권력을 세습화 했던 과거 가톨릭보다 더 노골적인 타락을 행했다.
외적인 교리나 교권이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지 못한다. 성서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만이 우리를 의롭께 하시는 의임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내 의가 되고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고 하나님의 법이 내 법이 되면 하나님은 자기 법이 된 우리를 두고 “제(자기)법이야”라고 칭찬할 것이다.

[약력]
현 목포산돌교회 목사
현 전남 NCC 회장
현 목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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