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유와 공유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2년 11월 23일(수) 1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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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세금 문제로 예수를 책잡으려고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 몇을 예수에게 보낸 사건이 생각난다. 바리새파와 헤롯 당원은 적대적이다. 바리새파는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믿는 사람들이고 헤롯당원은 로마에 충성스런 헤롯 왕을 추종하는 사람들이다. 하나가 종교라면 다른 하나는 정치다. 서로 섬기는 사람이 다른 이 두 파는 예수를 책잡으려고 그 날 합세했다. 왜 그랬을까?
적대적인 두 파는 와서 온갖 감언이설을 편다(막 12:14). 예수님은 거짓이 없이 정직하게 말하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이 가르친다고 말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이 질문은 주민세에 관한 이야기다. 서기 6년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 임금 아르켈라오스(헤롯 대왕의 아들)를 폐위시키고 코포니우스를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주민세를 거두어 황실금고에 바치도록 했다. 여기 주민세란 인두세로서 어린이, 노인만 빼고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 주민 누구나 내야했다.
이때 갈릴리 출신 유다라는 사람이 하나님 홀로 유대인의 통치자라는 구호 아래 납세 거부운동을 일으키고 아울러 무력으로 황제의 통치 대신 하나님의 통치를 이룩하려고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유다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열혈당을 만들었는데 이 배경이 바로 주민세 문제였다. 그래서 예수님이 납세를 거부하면 로마에 대한 반역이며 납세를 인정하면 하나님에 대한 배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 질문의 함정이다. 죽이기로 작정한 질문이다. 이렇게 대답해도 죽이고 저렇게 대답해도 죽인다.
예수는 그들의 의도를 아셨다. 그렇기에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막 12:15)고 묻는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질문이 문제이다. 나아가 질문을 한 사람의 의도가 문제다. 예수는 데나리온 주화 하나를 가져오라 한다. 데나리온 로마 주화이다. 그리고 예수는 거기에 나타난 초상과 글을 보고 묻는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막 12:16) 거기에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흉상이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티베리우스 황제, 신적인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아우구스투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황제가 신으로 숭상된 주화이다. 분명 그 주화는 로마가 만들었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이다. 예수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막 12:17)고 말한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말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여기 ‘초상’이란 헬라어로 ‘에이콘’인데 이것은 창세기 1장 27절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형상’과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라틴어로 ‘이마고 데이’라고 불려져 그 형상은 ‘이미지’ 즉 겉모습으로 이해되어져 왔다. 형상은 구약성서 히브리어로 ‘첼렘’인데 이것은 더 이전 아카드어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찰문’이다. 그 뜻은 신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 그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우리 말 성서가 형상이라고, 겉모습, 이미지로 오역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카드어 ‘찰문’이 그 뜻만으로 ‘동상’이라고 여기며 겉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신의 동상은 신 자체를 나타내는 것임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에나 동상이 겉모습이지 고대인들은 신 자체다. 따라서 형상이 아니라 본질이다.
주화에 새겨진 형상이 황제라면 황제의 것이고 네 마음에 새겨진 형상이 창조의 첼렘인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은 여기서 새겨진 말씀이다. 주화에는 황제를 나타내는 글이 있다. 황제의 것이라면 황제 개인의 것 사유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 글로 보는 사람에게는 다르다.
“하나님의 것이라면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믿지 않는 분이 오래 전 어느 날 나에게 용기를 내어 물은 질문이 있다. “교회의 헌금은 목사님이 다 갖는 것인가요?” 그는 그것이 굉장히 궁금했나보다. 그의 말이라면 그것은 사유다. 사유이기에 문제가 되곤 한다. 사유이기에 교회도 사유재산처럼 세습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진정한 의미는 공유다.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새겨진 공유다. 불행히도 종교나 정치나 사유에 허덕인다. 교회를 사유화하듯 정치는 권력을 사유화 한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사유다. 資(자)가 本(본)이 되는 사유다. 맘몬이라는 물질의 신을 우리는 숭상한다. 그 자리에 하나님은 없다. 그러니 사유만 있고 공유는 없는 것이다. 공유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이다. 내 것이라도 마음대로 써서는 안된다. 다만 하나님이 맡겼을 뿐이다. 내 것이라도 두려운 마음으로 써야 한다. 그래서 청지기라고 한다. 자연마저 사유화하여 벌어지고 있는 코로나 정국이다. 목포시가 공공버스를 어떤 형상의 마음으로 할지 기대해본다.
[약력]
현 목포산돌교회 목사
현 전남 NCC 회장
현 목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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