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최고의 대쪽 사대부 정암 조광조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2년 12월 01일(목) 1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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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때 역참을 관리하는 벼슬 종6품 어천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 중이던 점필재 김종직의 수제자 안훤당 김굉필에게 가르침을 받아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오직 공부에만 전념해 ‘광인(狂人)’이라는 별명속에 학인 시절에는 친구들과도 일체 교류를 끊은채 항상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대로 따랐으며 매사를 절제했다.
1510년(중종 5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 때 다섯살 년하로 생원과에서 장원한 화순 출신 학포 양팽손을 처음으로 만나 평생 지기가 되었다. 정암이 관직에 나아간 시기는1506년 중종반정 이후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폭군 연산군이 축출되고 기성세대인 훈구파와 공신들의 전횡을 견제 하면서 새로운 왕도정치를 펼쳐 왕권을 확립하여 민생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일차 과제였다. 성균관의 유생의 대표였던 정암은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실시되었던 별시문과에 을과로 입격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까지 오르는 동안 깔끔한 업무처리로 중종 임금의 큰 신임을 얻었다. 정암은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주장하며
경연때마다 역설하였다. 정언직에 오르자 언관으로서 그의 정치 논리를 더욱 맹렬하고 정연하게 펼치기 시작하였다.
중종의 제 1계비 장경왕후가 죽자 조정에서는 제2계비의 책봉 문제가 거론되었다. 이 때 순창군수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등은 중종의 폐위된 정비 신씨를 복위시킬 것과 신씨의 폐위를 앞장서 주장했던 박원종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다가 대사간 이행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때 조광조는 임금에게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를 막는 결과가 되므로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이라며 무죄를 강력히 주장 해 되려 대사간 이행을 파직하게 하여 조광조는 신진 사림파의 신임을 받았다. 반면에 견제가 시작되었고 훗날 반정공신인 훈구파 원로들과 신진사류 사림파의 대립으로 발전해 기묘사화의 발생 원인이 되었다.
정암은 승승장구해 수찬을 역임하고 정랑이 되었다. 1517년에는 교리로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임했으며,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해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도록 주청했다. 당시 주자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말이었으나 널리 보급되지 못했고, 조선 초기에 와서도 학문의 경향이 사장(詞章)을 높이 숭상하여
과거시험도 사장에 치우쳐 도학(道學)은 경시되었다.
정암의 도학에 대한 열정과 주창을 계기로 조선의 학풍은 변화되어갔으며, 정암의 뒤를 이어 이황.이이 같은 훌륭한 학자가 배출되었다.
정암의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고려의 불교식에서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다. 일반서민들까지도 주자의 가례(家禮)를 지키게 되고 상례(喪禮)를 다하고 젊은 과부의 재가도 허락하지 않았다.
1518년 부제학이 되어서는 유학의 이상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군왕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또한 미신 타파를 내세워 궁안의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혁파했다.
그 해 11월에는 대사헌에 승진되어 부빈객을 겸하게 되었고 천거제인 현량과(賢良科)를 처음 실시해 김식(金湜)·안처겸(安處謙)·박훈(朴薰) 등 28인이 현량과에 뽑혔으며, 김정(金淨)·박상(朴尙)·이자(李耔)·김구(金絿)·기준(奇遵)·한충(韓忠) 등 소장학자들을 뽑아 조정의 요직에 안배했다.
현량과를 통해 신진사류들을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켜 개혁을 시도하려고 했다. 신진사류들과 함께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舊制)의 개혁으로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나섰다. 1519년(중종 14)에 이르러 훈구세력인 반정공신 문제를 꺼냈다.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너무 많음을 강력히 비판하며 성희안(成希顔) 같이 반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뽑았고, 유자광(柳子光)은 그의 척족들의 출세를 위해 반정했다며 소인들이나 꾀하는 일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권좌에 올라 모든 나라를 다스림에 사익를 추구 하고 있으므로 개정하지 않으면 나라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주창하였다. 따라서 반정공신 2.3등급은 개정해야 하고, 4등 50여 인은 삭제함이 옳을 것이라는 위훈삭제를 강력히 청했다.
정암의 주장은 근거가 뚜렸했다. 이미 반정 초기에 대사헌 이계맹(李繼孟)이 원종공신이 너무 많으므로 공의 진위를 밝힐 것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세력이 약했던 신진사류들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반정공신들은 기성 귀족이 되어 세를 형성해 현실적으로 원로가 된 훈구세력들을 소인배로 몰아 배척하려는 성급한 주장을 임금 중종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암의 계속된 주청으로 마침내 2.3등 공신의 일부와 4등 공신 전원을 포함 전체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의 훈작을 삭탈했다. 이에 훈구파들은 눈이 뒤집혀 강한 반발을 했다.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은 박원종의 양녀 경빈 박씨(敬嬪朴氏) 등 후궁들을 움직여 왕에게 정암의 신진사류들을 무고하도록 부추겼다.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중종에게 바쳐 의구심을 조장했다. 홍경주와 공조판서 김전(金詮), 예조판서 남곤, 우찬성 이장곤(李長坤), 호조판서 고형산(高荊山), 심정 등은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비밀리에 왕을 독대 해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성해 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있다고 탄핵했다. 왕도수업을 받지못한데다 경연 때마다 지나친 정암의 질타와 과격한 언행에 염증을 느껴오던 중종은 훈구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김정.김구.김식.박훈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김정·김식·김구와 함께 정암도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의 간곡한 주청으로 화순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 뒤 정적인 훈구파의 김전·남곤·이유청이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임명되자 그들에 의하여 그 해 12월 사사되었다.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고 한다.
결국 신진사류들이 기성세력인 훈구파를 축출,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의 실패 원인은 그들이 대부분 젊고 또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가 개혁을 급진적이고 너무 과격하게 이루려다가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나 이론을 실천했는데, 이 이론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했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 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고 하였다.
상훈과 추모
그 뒤 선조 초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 뒤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해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도 설립되었다. 1570년 능주에 죽수서원(竹樹書院), 1576년 희천에 양현사(兩賢祠)가 세워져 봉안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그의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에 봉안되는 등 전국에 많은 향사가 세워졌다.
또한, 이이는 김굉필·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 등과 함께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불렀다. 저서로 『정암집』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소(疏)·책(策)·계(啓) 등의 상소문과 몇 가지의 제문이고, 그 밖에 몇 편의 시도 실려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훗날 역사학자 이이화의는
조광조를 평하기를 '
너무나 곧은 사람이었기에 일찍 부러진 표본이었다. 선비는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며 정암의 기질을 평했다
정암 조광조가 사림의 영수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한 것은 1515년부터 1519년까지의 만 4년 동안의 짧은기간이다.
역사는 가정이 없다지만, 만일 정암이 흔들림없는 중종의 계속된 신임속에 조광조가 꿈꾸었던
개혁이 완수 되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으리라 확신한다.
예나 지금이나 완전한 개혁을 한다는것은 결코 쉬운일은 아닌것만 같다.
월봉 김오준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