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형벌제도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2년 12월 15일(목) 10:35
월봉 김오준
조선시대 형벌제도는 경국대전에 명시된,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라는 5개의 형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의 '대명률'을 기준으로 제정되어 '조선경국전', '경국대전'.'속대전'.'대전통편'.'대전회통' 등 수 차례 개정되었다. 회초리로 가벼운 죄인을 다스리는것부터 출발 해 중죄인에게는 능지처참까지 가해졌다.
태형은 풍속 사범이나 경미한 절도죄. 상해죄 등 경범죄를 저지른 죄인에게 내리는 형벌이었다.
​조선시대 형벌제도 중 가장 가벼운 형벌로 회초리로 볼기나 종아리를 때리는 형벌이었다. 10~50대까지로 경범죄 죄인들에게 가해진 형벌이다. 돈이나 면포로 형을 대속 할수 있었는데 50대는 면포 1필을 내면 형이 면죄 되었다.
1910년에 왜놈 경찰과 헌병들이 조선인들을 길들이기 위해 마구 집행 하다 3.1기미만세사건 후 ​폐지되었으나 실제는 해방이 될때까지 계속 되었다.
​장형은 태형보다 더 중한 죄를 저지른 죄인에게 내려지는 형벌로 넓적한 형구로 볼기를 때리는 형벌이다. 사극​ 드라마에서 자주 볼수있었던 곤장으로 ​죄인을 다스렸는데 보통 60대를 쳤다고 한다.
​남자의 경우에는 옷을 벗고 맞았고 아녀자의 경우 벗지 않았으나 ​간음을 하였을 경우에는 벗기고 집행했다.
​​도형이란, 노역의 형벌이다. ​징역을 사는 것인데. 그 기간은 1년, 1년 6개월, 2년 6개월, 3년 기간이었다. 도형을 받은 죄인들은 장형을 먼저 맞은 후 집행되었기에 장독으로 옥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배형은, 귀향이나 유배를 보내는 형벌이다. ​주로 벼슬아치나 양반들이 받았던 형벌로 나라에서 중 죄를 지은 죄인을 외진 섬과 추운 북쪽지방으로 보내서 일정기간 한정적인 장소에서 죄값을 치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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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은 목숨을 빼앗는 형벌이다. 교형, 참형, 능지처참.효수의 4가지가 있었다.
​역모나 살인.강상죄 등 극악의 범죄를 저지른 범죄인들에게 내리는 큰 형벌로 조선시대 가장 무서운 죄는 임금을 능멸했다는 소위 '능상지풍'이었고 죽은 범죄자를 부관참시해 뻐를 갈아 바람에 날려버리는 '쇄골표풍'도 폭군 연산군은 자행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태형이나 장형의 경우 비교적 가벼운 죄를 지은 경우 볼기를 때리는 형벌이다. 태형은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의 다섯 가지가 있었고 장형의 경우 60대, 70대, 80대, 90대, 100대의 다섯 가지다.
대명률에서는 볼기를 치는 회초리는 가시나무를 쓰라고 규정되어 있으나 조선에서는 물푸레 나무를 사용했고 없을 경우 다른 나무도 사용했다. 태형의 회초리 크기는 1미터정도인 3척 3촌, 넓이는 18cm 폭은 0.8cm였다.
 드라마에서 고을사또가 동헌뜰에 형틀을 차려 놓고 곤장을 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곤장은 버드나무로 만들었고 원래는 군대에서 군무 이탈의 경우 군기를 바로잡기 위해서 곤장을 칠수 있었다.
종5품 현감 이하의 수령은 신장을 형기구로 죄인을 심문 할 때 사용했는데 50대 까지만 때릴수 있고 그 이상은 상급자인 관찰사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증거물이 명백한데 자백을 하지 않는 경우, 한 번에 30대 까지 때릴 수 있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아 세종 때 형조판서였던 하정 유관이 몇차례 상소해 바로 잡으려고 했었다.
종4품 이사의 군수나 부사 등 지방관도 곤장 50대 이상의 형벌은 관찰사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포도청.한성부. 병영.변방수령 등은 60대에서 100대까지 집행할수 있었으며 중죄인은 한양의 형조나 의금부로 압송해 처리하고 생사여탈의 권한은 국왕에만 있었고 암행어사도 장계를 띄운후 국왕의 처분을 기다려 집행해야 했다.
도형은, 중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 감옥에 가두워 두고 일을 시키는 것으로 지금의 징역형과 비슷하다.
도형의 경우 1년, 1년반, 2년, 2년반, 3년까지 다섯 가지가 있다.
1년의 경우 장 60대, 1년반의 경우 장 70대, 2년의 경우 장 80대, 2년반의 경우 장 90대, 3년의 경우 장 100대의 형벌을 반드시 집행 후 도형을 언도 받았다.
죄인들은 감옥에 가두어 철을 만드는 일, 소금 만드는 일, 종이 만드는 일 등을 노역을 시켰다. 유배형은 매우 중한 죄를 지은 경우 낙도나 추운 북쪽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는 형벌로 거리에 따라 유배 2000리, 유배 2500리, 유배 3000리 세가지가 있다.
유배지도 출입이 자유로운 고향안치의 귀향에서 절도안치나 추운 북쪽지방의 출입구역 제한의 위리안치 귀양이 있었고 북쪽 보다는 물산이 풍부하고 따뜻한 남쪽 지방으로 가는 경우 살아남기가 쉬웠다고 한다.
사형은 교형, 참형, 능지처참형, 효수가 있었다. 교형은 목을 매는 형으로 신체가 보존되는데 참형은 목을 베어 신체를 분리시키는 형이다.
능지처사, 능지처참은 죄인의 몸을 분리 시키고 매장을 허용하지 않았고 효수는 능지처참 후 목을 장대에 매달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는 형벌이었다.
일부 왕족이나 사대부의 경우는 사약을 내려 신체를 훼손치 않도록 해 주었다.
사형 집행 시기도 3월 21일부터 9월 21일까지 춘분과 추분 사이에 집행토록 했으며 해뜨기 전, 눈비 오는날, 명절날, 24절기에는 집행을 금했으나 '부대시참'의 역모죄나 강상죄인 경우 때를 가리지 않았다.
 죄인들의 고문은, 난장형. 주리형.압슬형.낙형이 있으며 난장형은 발가락를 뽑거나 매질을 가했으며주리형은 두 나무를 양쪽 정강이 사이에 얽어 끼워 비뜰었고 압슬형은 정강이를 나무로 강하게 누르고 사기조각. 다듬이돌을 무릎위에 올려 놓았으며 낙형은 몸을 달군쇠로 담근질하며 주장당문형은 여러개의 붉은 몽둥이로 몸을 난타한다.
문무관 벼슬아치들과 양반들은, 태. 장형은 돈으로 납부하거나 하인들을 데려다 대신 집행했다, 사대부의 부녀자들도 형장을 금했으며 노인과 어린이도 고문은 금지되었으나 1589년 10월, 기축옥사때는 광산이씨 이발의 모친과 어린 자식의 목숨을 빼앗았다.
특히 곤장은, 임진왜란 이후 군율을 다스리는 군영.진영.토포영 등에서 적용되다가 포도청과 한성부까지 확대되면서 도적을 다스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영조때 시행한 '흠휼전칙'에 곤장의 종류는 대곤, 중곤, 소곤, 중곤(重棍), 치도곤(治盜棍) 등으로 구분했는데, 사용기관과 규격까지도 명시했다.
종류별로 길이.너비.두께를, 소곤은 5척 1촌. 4촌. 4분이었고 중곤은 5척4촌. 4촌1분. 5분이었으며 대곤은 5척6촌. 4촌4분.
6분이었고 중곤(重棍)은 5척 8촌. 5촌. 8분에 치도곤은 5척 7촌. 5촌3분. 1촌으로 규격을 정했다. 난장으로 인해 사망자가 늘어 영조는 곤장의 죄를 범한 자라도 10대를 넘지 않도록 하고, 곤장의 재질도 참나무와 같은 단단한 재질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등 그 남용을 엄히 제한하였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심문중에 난장으로 사망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태형을 참지 못하고 강제로 자백했던 죄인들이 국청으로 돌아오면 증언을 번복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이에 정조는 '죄인의 치리에 있어 살피고 또 살펴 처리하라.'는 뜻을 담긴 '흠흠신서'를 다산 정약용을 시켜 편찬케 했다.
치도곤이란 용어는 지금도 몹시 혼이 나거나 곤욕을 뜻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더구나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일제가 '조선태형령'이라는 것을 조선인들에게만 시행했는데 태형에 쓰던 형구를 숫소의 성기를 말려 채찍으로 사용하거나 째찍의 끝에 납덩이를 매달아 조선시대의 태형보다 휠씬 가혹했다. 특히 지방 헌병대장의 자의적 판단으로 태형을 마구 집행할 수 있어 헌병과 경찰은 공포의 대상이 되어 "순사 온다."는 말이 아이들이나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공포와 겁박의 용어가 되었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신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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