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상 공동체 김종수 목사의 ‘하늘샘물 흐르는 곳에’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2년 12월 29일(목) 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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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크게 실망한 두 제자가 엠마오 마을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들과 동행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저녁이 될 때까지 함께 걸어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이 제자들인데 예수님의 얼굴을 모를 리는 없다. 그런데 왜 못 알아보았을까?
그런 그들에게 묘한 사건이 발생한다. 누가복음 24장 29절 이하에서 저녁때가 되고 날이 저물자 그들은 집에 이르러 함께 음식을 나눈다. 그런데 음식을 함께 나누는 순간 비로소 두 제자는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본다. 즉, 온종일 걸으면서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는 그분을 못 알아보더니 같이 밥 먹을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이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누가복음 24장 35절에서 다시 반복된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떡을 뗄 때, 밥을 먹을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늘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밥상의 의미를 다시 환기시킨다. 예수님은 체포되기 직전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저녁 만찬을 가지셨다. 그 저녁 식탁에서 음식을 나느며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은 식탁 자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셨다. 식탁의 문제를 제쳐 두고 인간의 문제를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문익환 목사님이, 생전에 그 분이 개척한 한빛교회 전도사로 있던 나에게 이런 말을 하셨다.
“김 군, 왜 사람이 밥을 세 끼 먹는 줄 아나? 내가 감옥 독방에 있어 봤는데 사람은 한 끼면 족하네. 세 끼씩이나 먹을 필요가 없네. 그런데 세 끼를 먹는 이유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지. 언제 부모 형제 이웃과 만나겠나? 밥상에서가 아닌가?”
우리 유교 의식에는 제사가 있다. 제사에는 제사상이 등장한다. 제사상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다. 죽은 사람이 음식을 먹을 수 있겠는가?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밥상을 차리고 고인에게 예를 갖춘다. 죽어서도 함께 밥상을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건만 산 사람을 위해서는 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김지하의 [밥]이라는 글을 보면 동학 최시형 선생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한 뒤 이천군 앵산동이라는 몇 호 안 되는 마을에 피신해 있었는데, 이 때 그는 새로운 제사상에 대해 말했다. 보통 제사란 죽은 분의 위패를 벽에 놓고, 그 벽 앞에 제사상을 차린다. 이것을 ‘향벽설위(向壁設位)’를 말한다. 이것은 제사상을 죽은 이에게가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살아 있는 이들에게 돌려 놓는 것을 말한다. 음식은 살아 있는 이들이 먹고 나누는 것이기에, 또한 이미 가신 조상님의 바람은 우리 후손들이 서로 나누며 사는 것이기에 ‘향아설위’라는 혁명적인 제사를 말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 알고 보면 우리들의 일상의 밥상이다. 서로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누는 우리 밥상과 같다. 우리가 나누는 밥상, 그것이 제사요, 예배라는 말이다. 우리 하늘샘교회에서는 주일 예배가 끝나면 우리가 준비한 밥상이 기다린다. 밥상을 대하며 서로 마주 보고 즐거워하는 모습, 나는 그것이 진정한 예배하고 생각한다.
우리는 예배 속에서 종종 성찬식을 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하신 최후의 만찬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파리똥만한 카스텔라와 목구멍을 넘어가지도 않을 양의 포도주를 먹는다. 이것이 어찌 만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예배가 끝난 후 주걱으로 퍼주는 밥을 숟가락으로 먹고, 푸짐한 국과 반찬을 서로 즐겁게 나누며 먹는 것, 이것이 예배요, 진정한 성만찬인 것이다.
교회는 밥상 공동체다. 밥상 공동체를 이룰 때 비로소 교회는 부활 공동체가 된다. 예수님과 함께 엠마오로 가면서 하루종일 토론을 하고도 몰랐는데, 밥 한 그릇을 나누고서는 금방안다. 그 제자들이 음식을 나눌 때에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길에서 해 주신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예수님이 길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마음이 뜨거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리를 언제 했는가? 식탁에서 음식을 나눌 때 비로소 말씀이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밥 한 그릇을 나눌 때 비로소 부활의 의미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함께 둘러 앉아 먹고 나누는 밥상을 통해서 부활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복음서는 부활의 첫 목격자들이 하찮은 여인네들이었다고 일제히 보도한다. 왜 이들 여인네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당시에 밥을 만드는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살리는 밥, 상을 이러우 서로 바주보며 삶을 나누는 밥상, 그 밥상을 만드는 이가 당시에는 여인네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바로 이 밥상을 만든 여인들에게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작된 공동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밥상 공동체다.
오늘날에는 밥상을 차리는 것에 대해 남녀 구별이 없어져 가고 있다. 다행이다. 함꼐 음식을 즐겁게 나누고 마시고 하는 밥상을 차리는 일에 남녀 구별이 없어져간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성숙해지고 있다는 것, 사회가 다시 태어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부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더 큰 부활이 있다. 예수님은 당신이 밥상을 차렸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밥이 되셨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당신이 밥이라고 하신다. 그렇다! 우리는 이것을 약하나마 식탁에서 경험한다. 밥을 먹는다고 다 밥이 아니다. 식탁이라고 다 식탁이 아니다. 누구하고 바을 먹느냐에 따라 밥맛이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무엇이라고 말하나? ‘재수없어, 밥맛이야.’ 하지 않는가? 식탁의 밥과 반찬이 아니다. 함께 음식을 나누는 사람이 밥이요, 반찬이다.
나와 밥을 나누고 있는 상대방만이 밥이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상대를 탓할 것이 아니다. 그 밥은 나다. 나의 작은 친절한 말 한 마디, 안부를 묻는 말 한 마디에서부터 진정으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까지, 크고 작은 밥이 바로 나다.
우리 집 앞에는 10여 개의 포장마차가 있다. 거기 8호집 아줌마는 나와 나이가 같다. 물론 내가 목회자인 줄은 모른다. 몇 해 전 우리 교회 젊은 청년 집사 둘과 함께 그 포장마차에서 주님(?)을 함께 나누었다. 물론 계란말이, 곰장어도 곁들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그 8호집을 다시 갔는데, 그 아줌마가 나보고 이런다.
“아들 둘이 아주 든든해 보입니다.”
나는 좀 기분이 나빴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하는 생각이 들어 순간 기분이 나빴지만, 음식을 나누는 우리가 부자지간으로 보였다니 우리 만남이 허튼 만남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심으 뿌듯했다.
어쩌다 하는 일이지만 기도를 위해서건 건강을 위해서건 가끔 금식을 한다. 그럴 때마다 다시는 금식하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한다. 외롭기 때문이다. 밥상은 대부분 누군가와 함께 한다. 혼자 먹으면 급히 먹게 되기에 건강에도 별로 좋지 않다. 혼자 먹으면, 먹는다기보다는 때운다고 한다. 외롭다. 밥상은 나누는 것이다. 너와 내가 밥이 되어 나누는 것이다.
옛 어른들은 명절이 되면 밥상을 차려 놓고 한 잔 걸치고 ‘니나노’하며 놀았다. ‘니나노’의 어원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 말이 ‘니하고 나하고 놀자.’로 들린다. 니하고 나하고 함께 나누며, 함께 즐기며,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며 온종일 길을 걸었던 엠마오의 두 제자가 하루 종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음식을 나눌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 이것은 말씀이라는 것도 눈으로 보이는 밥을 나눌 때에갸 비로소 삶이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런데 누가복음 24장 31절에 의하면 두 제자가 음식을 나눌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는데, 그 순간 예수님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예수님이 밥먹다 마술처럼 사라졌다는 것일까?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두 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처럼 살다 예수처럼 죽었다. 예수처럼 그들이 밥이 되어 살다 갔다. 생명의 양식을 전하다 순교당한 것이다. 자신이 밥이 된 것이다. 바로 그들이 밥이 되었기에 오늘날까지 우리가 교회를 이루어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하늘샘교회 식구들은 함께 나누는 밥상을 통해 하늘 밥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그냥 먹지 말자. 옆자리 앞자리에 있는 식구들을 돌아보며 안부를 묻고 덕담을 나누자.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의미도 몸으로 깨달아질 것이다.
[약력]
현 목포산돌교회 목사
현 전남 NCC 회장
현 목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대표
영암일보 yailbo@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