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마 임백령과 기생 홍매의 슬픈 사랑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3년 01월 05일(목) 11:59
월봉 김오준
괴마 임백령은 전라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선산 임씨요. 임득무의 후손으로 참판으로 추증된 임수의 손자다. 판서로 추증된 임우형의 아들로 어머니는 영암 구림 출신의 음성 박씨 부인으로 일찌기 남편과 사별하고 다섯 아들들을 엄히 가르쳐 모두 입신 양명케 한 드기드문 현모양처 였다고 전한다.
임천령,임만령,임억령,임백령, 임구령 등 5형제는 호남 최고의 선비 눌재 박상과 박우에게 공부했다. 다섯 아들 모두 다 입신양명해 첫째 임천령과 둘째 임만령은 1519년 기묘사화로 정암 조광조와 함경도 단천에서 귀양살이를 했기에 셋째 임억령은 아우 임백령이 출세욕이 강하고 성격이 호방하여 척신 윤원형을 가까이하자 아우 의 장래가 염려되어 몇차례 충고를 했으나 오히려 같은 무리로 끌어 들이려하자 형 억령은 낙향 해 은둔하다 아우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벼슬길에 나갔다.
형의 간절한 충고를 외면한 넷째 임백령과 다섯째 임구령은 1545년 을사사화에 앞장서 보익공신이 되었으나 둘 다 오래 가지는 못했고 결과도 좋지 아니했다.
아우들과는 성정이 다른 석천 임억령은 대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와 시강원 설서를 지냈다.
글재주도 뛰어났고 성품이 온화해 글친구들이 많았고 정쟁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은채 모친 봉양을 위해 전라도 수령을 자원했었다.
아우 임백령이 을사사화의 주모자로 공신이 되자 형으로서 자제시키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했다. 윤원형 등 소윤당이 임억령에게 원종공신 3등에 봉했으나 과감히 거절했다. 동생 임백령이 명나라에 성절사로 다녀오다 객사한 후 조정의 부름을 받아 강원관찰사를 지내고 담양부사를 끝으로, 사위 김성원이 지어준 담양 식영정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풍류를 마음껀 즐기다 여생을 마쳤다.
형과는 기질이 다른, 괴마 ‘임백령’은 그의 호처럼 '괴마'의 길을 달려 삼정승의 반열에 숩게 올라 병오년에 그만 빙셩에 세상을 떠났다.
꿈속에서 별호인 괴마와 대과의 시험문제까지 선몽을 받아 문과에 장원 급제한 수재에 어려서부터 성격이 워낙 깔끔하고 매사 일처리가 분명한 쾌남아로 어머니 박씨 부인의 큰 기대속에 사랑도 듬뿍 받았다 전한다.
그가 당시 정권의 실세였던 문정왕후의 동생이요. 명종의 외숙인, 척신 소윤당 윤원형과 의기가 투합해 소윤당이 된 사연은 비록 야담이지만, 과거에 급제 해 친구들이 베풀어준 축하연에서 처음 만난 기생 홍매를 만나 첫 눈에 반해서 서로 사랑을 나누었는데 정경왕후의 남동생 이요.인종의 외숙인 대윤당 윤임이 임백령의 애인 홍매를 강제로 빼앗아가 첩으로 삼자 그 원한으로 앙심을 크게 품고 복수키 위해 반대당 소윤편에 가담해 책사가 되어 온갖 지모를 발휘하여 대윤당 윤임과 김안노를 역모로 몰아 복수하고 옛 애인 홍매를 다시 차지했다는 야사가 전한다.
임백령은 영광군수와 승정원 도승지를 지내고 대사헌, 경기 경상관찰사등 요직을 거쳐 호조판서까지 승차했고 이때 소윤닷 윤원형이 임백령을 책사로 끌어 들여 대윤당 윤임을 역모죄로 축출 해 임백령은 1등 공신에 책록된 후 정1품 우의정에 올랐다.
정적 축출로 안간힘을 쓰다가 기력이 소진된, 임백령은 명나라에 사은사로 돌아오던 길에 48세의 한창 나이에 객사했다.
명종이 사망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임백령은 을사사화의 간적으로 지목되어 훈작 마저 삭탈되는 큰 수모도 겪었다.
동생 임구령도 형 임백령과 함께 을사사화에 참여하여 위사공신 2등에 책록되어 종5품 별좌에서 벼락출세를 해 남원부사, 나주목사를 거쳐 정3품 광주목사 재임중 비리가 드러나 전라감사 송인수의 장계로 파직된 후 외가인 영암에 정착 해 구림대동계 창설에 참여했고 지남제 간척사업과 후학을 양성하며 영암에 뿌리를 내렸다. 함경도 경성부 기생 홍랑과 아름다운 사랑을 엮은 삼당시인 고죽 최경창의 장인이 바로 임구령이다.
괴마가 주동이 된, 을사사화는 조선의 4대 사화에 들어간 외척들간의 싸움이었다.
조선 최단기 임금의 한 분이었던 착한 인종의 모후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오래비 윤임을 ‘대윤’이라 했고, 마마보이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형을 ‘소윤’이라 했다. 인종이 비명에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의 윤원형과 호조판서 임백령 등이 대윤의 형조판서 윤임과 김안로 등 반대편 유림들을 축출했던 사건이었다.
임억령은 넷째 아우 임백령과 다섯째 아우 임구령에게 피바람을 일으키는 일에 가담치 말라고 몇차례나 서신을 보내 충고했다.
두 동생들은 형의 간절한 청을 듣지 않았고 결국 1545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외척들 간의 치열한 싸움에 끼어들었으니 그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조선의 9대 임금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는 연산군의 이복 동생인 진성대군을 낳았다. 반정공신들이 폭정을 일삼던 10대 연산군을 축출하고 진성대군을 11대 중종으로 추대했다. 이 사건이 이른바 중종반정이다. 중종의 정비 단경왕후 신씨는 반정에 등을 돌린 신하의 딸이라는 핑게로 7일 만에 반정공신들에 의해 폐비조치 해 버렸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를 윤씨를 취해 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사망하자 또 다시 제2계비로 문정왕후 윤씨를 왕비로 들여 명종을 낳았다. 정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주축으로 김안로 등 대윤파와 제2계비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 임백령 등의 소윤파가 왕위계승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중종이 사망하자 제1계비 장경왕후의 아들이 12대 인종으로 즉위했으나 8개월 만에 찰떡을 먹고 승하하자 제2계비 문정왕후의 아들이 13대 명종으로 즉위했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탄력을 받은 윤원형.임백령 등 소윤파는 윤임.김안로 등 대윤파가 월산대군의 손자였던 계림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며 역모죄를 씌워 윤임 등 대윤파와 사림파 일부까지 숙청했던 사건이 을사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을사사화라 고 한다.
'형만한 아우가 없다.',는 옛말 따라 아우들의 기질과 정국의 흐름을 일찌기 예견한 형 임억령은 동생 임백령과 임구령에게 ‘잘 있거라 한강수야 평온하게 흘러서 파도를 일으키지 말라’는 유명한 시를 지어 사전에 경계했으나 아우들은 경시했고 다섯째 임구령 마저 을사사화의 공훈이 인정되어 정3품 광주목사로 승진했으나 사헌부, 사간원 양사의 탄핵과 전라감사 박수량의 상소로 광주목사에서 파면됐다. 임백령, 임구령 2형제는 시류에 편승하여 출세의 길에서 각각 비명형사와 낙오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석천 임억령은 병을 핑게로 벼슬을 사직하고 무등산 기슭에 사위 김성원이 세운 식영정에서 은둔했다. 식영정(息影亭)은 ‘그림자도 쉬어가는 곳’이라는 뜻이며, 임억령은 임성원, 고경명, 정철 과 함께 식영정 4선(四仙)이 되어 풍류를 즐겼다. 사위 김성원과 문우 고경명은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맹활약해 만고충신이 되었고 송강 정철은 식영정에서 성산별곡을 지었으나 임백령 처럼 욕심을 부리다가 기축옥사의 추쇄관으로 동인당 호남선비 천여명을 죽이고 동인들의 철천지 원수가 되었고 종내는 건저위 문제로 선조의 눈밖에 나 강화도로 귀양가 굶어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 했다. 그러나 석천 임억령은 수를 다 누리다 고향 해남에 묻혔고, 화순 동복의 도원서원과 해남의 석천사에 배향되었다.
한편,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기생 홍매는 정인 괴마 임백령이 갑자기 요절하자 윤원형의 기첩이 되어 윤원형의 처 난정의 모진 핍박속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마포, 삼개나루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양상단과 왈패조직의 우두머리 윤태원이라고 전하며 근래에 방영된 드라마 '옥중화'에서 배우 고수가 배역을 맡았다.
을사사화를 주도해 대윤파 윤임을 축출한 소윤 일당들은 윤임이 꿈속에서 저주 해 사화를 일으킨지 3년안에 사화를 주도했던자들이 거의 다 비명횡사 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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