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젖 뗀 아이의 고요와 평온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3년 01월 10일(화) 13: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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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쇼, 목사 양반, 영업도 좋지만 잠 좀 잡시다.” 알고 보니 그 집 주인은 택시 운전기사인데 새벽에 일을 마치고 들어와 잠이 좀 들려고 하면 찬송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찬송이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아름답게 들리는 것만은 아니다. 때론 소음이기도 하고, 이웃에게 괴로움을 안겨 주기도 한다. 이뿐이랴, 지금은 거의 사라진 교회 차임벨 소리나 전도를 위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외침도교인에게는 익숙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소음이리라.
대다수 우리나라 교회 예배가 꽤나 시끄러운 편이다. 그러나 뜨겁게 찬양하고, 하심하여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 자체가 잘못 된 것은 아니다. 성서도 곳곳에서 열심히 찬양하며 합심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하였다. 다만 모든 것에 알맞은 때와 장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열광적인 예배와 찬양과 기도가 우리나라 교회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로 인해 열광적인 예배 의식이 대다수 교회의 모델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아주 중요한 신앙 생활의 한 부분이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침묵과 명상’이다. 물론 예배 순서에 ‘침묵의 시간’, ‘명상의 시간’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얘기가 아니다. 무어보다도 예의 주시해야 할 대목은 이런 열광적인 신앙 생활이 오늘날 바쁘게 돌아가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흡사하다는 점이다. 즉 신앙 생활이나 일상 생활이나 ‘여백’이 없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빠르고 바쁜 것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는 쫓기듯이 바쁘게 일하는 것에 익숙하다. 먹을 때도 여유가 없다. 먹는 것조차 인스턴트 식품의 지배를 받고 있다.
시편 131편에 젖 뗀 아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2절에 나타난 ‘젖 떤 아이’란 이유식을 거쳐 젖을 먹지 않게 된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방금 젖을 먹고 난 아이라는 말이다. 엄마들은 다 경험해 보았겠지만 아기가 배고파 젖을 달라고 할 때는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듯이 울어 대고 떼를 쓴다. 바로 젖을 안 주면 금방 큰일이라도 날 것 같다. 그리고 젖을 물려주면 아기는 허겁지겁 젖을 빨아 댄다. 그런데 다 먹고 난 다음에는 젖을 달라고 악을 쓰며 숨넘어갈 듯이 울어 댈 때와는 너무나 다르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하고 평온한 모습이다. 이럴 때 아이들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면 천사와 다를 바가 없다. 시편기자는 이것을 말하고 있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떤가? 지금 당장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숨이 막 넘어갈 것처럼 젖 달라고 보채는 그런 삶은 아닌가? 바쁘게 뛰어다녀야 일하는 것 같고, 그래야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 삶은 아닌가?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얻었나? 잠시 자신을 돌아볼 기도도, 잠깐의 말씀의 묵상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위치는 어디인가?
다람쥐 쳇바퀴를 잘 알 것이다. 다람쥐가 그 쳇바퀴를 타고 부지런히 돌면 돌수록 보이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빠르게 돌리면 돌릴수록 보이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빠르게 돌리면 돌릴수록 보이는 것은 자신의 꼬리 뿐이다. 오늘 바브게 쫓기듯이 살아가는 우리 삶이 바로 자신의 꼬리만을 좇는 그런 모습은 아닌가? 부지런히 살아왔는데 결국 다람쥐 쳇바퀴같이 제자리만 맴돌고 자기 꼬리만 따라다닌 꼴은 아닌가?
신앙 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다. 제 모습을 보는 것이다. 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뭔가 큰 일을 해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마치 젖 달라는 아이처럼 몸부림치며 살아온 자기 모습이 알고 보면 제 자리에 머문, 제 꼬리만 쫓은 모습이었음을 보는 것이 바로 신앙 생활이다.
사실 우리의 기도가 그렇지 않은가? 일방적으로 혼자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다가 ‘아멘.’ 하고 제 요구 사항만 말하고 끝난다. 웃어른과 마주 앉아 자기 얘기만 하고 그냥 일어나는 꼴과 비슷하다. 아마 이럴 때 우리는 버릇없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의 기도에 기다림이 없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의 음성과 그분의 응답을 기다리는 침묵과 명상이 없다. 고요와 평온의 기도가 없다.
싯다르타는 그를 찾아와서 삶의 문제를 논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1년 후에 다시 질문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1년의 명상을 거치라는 것이다. 대부분 그 1년 전의 질문은 없어진다. 근본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제 욕심이었고 주제 넘은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의 바쁜 선교에도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아무리 바빠도 자신을 돌아보는 것만큼 바쁘고 절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적한 곳에서의 기도, 이것으로부터 그분의 말씀의 능력과 치유의 능력이 나왔다.
이제 삶의 중심을 옮기라. 젖 뗀 아이에게로 삶의 중심을 이동하라. 하나님께 소망을 둔 젖 뗀 아이의 고요화 평온에게로 삶의 중심을 바꾸라. 거기에 길이 있고, 삶의 응답이 있다.
[약력]
현 목포산돌교회 목사
현 전남 NCC 회장
현 목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대표
영암일보 yailbo@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