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선을 베풀어 가문을 지켜낸 부자들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3년 01월 19일(목) 13:22
월봉 김오준
황금만능의 외래문화가 범람해 갈수록 휴머니즘을 상실 한채 물질에 의해 삶의 가치와 척도가 좌우되는 안타까운 사연과 장면들이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현실속에 혼돈의 시대적 세파를 탐심을 자제하고 적선과 긍휼로서 선을 실천해 어려운 격변기에 가문을 지키고 부를 계승한 우리나라 몇몇 부자들의 숨은 비화를 살펴보자.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는 명재고택으로 유명한 파평윤씨 윤증의 집이 있다. 조선시대 소론의 당수가 바로 명재 윤증이 살았던 곳이다. 워낙 성격이 대쪽같고 꼬장꼬장해 일상적 생활 자체를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며 부녀자들이 거주하는 안채를 빼놓고는 담장을 아주 낮게 치거나 없애 버렸고 대문도 없애 투명한 삶의 모습을 모두 공개했으며

굶주린 사람들은 가져다 먹으라고 대문과 장독, 쌀독을 열어놓고 방임했던, 명재 종가의 제 1계명은 ‘뽕나무를 기르지 말라’ 였다. 누에를 쳐 당시 큰 소득을 올릴수 있었던 양잠업을 가문과 후손들에게 철저히 금했다. 그 까닭은 만석군 윤씨네 집안마저 양잠업을 하게 되면 일반 백성들의 소득원을 빼앗는 행위라고 여겨 배려였다. 또한 명재 윤씨 집안은, 추수한 나락을 보통 5일 정도 햇볕에 말리는게 상례인데, 명재 집안은 추가로 이삼일을 더 연장해서 말리게 했다.
그 이유는, 인근에 사는 형편이 어려운 민초들이 밤이나 해질무렵 명재의 나락을 가져가더라도 슬쩍 눈 감아주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하며 배고픈 이웃들을 배려한 명재 윤증 집안의 없는 사람들에 대한 큰 마음 씀씀이었다.

일년에 무려 300석 이상의 쌀을 식량으로 소비시켜 지나는 길손이나 빈민들의 굶은 배를 채워주어 구제의 손길을 펼쳤다고 한다.
윤증은 조선 숙종때 사람으로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해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당대 최고의 정통파 석학이었다.
스승이었던 최고 권력자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과 선친 윤선거의 묘갈명 사건으로 우암을 의리없는 선비라고 규탄하며 절교를 선언했고 조정에서 여섯 차례나 벼슬을 내렸건만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고 왕의 얼굴을 한 번 보지 않은 채 정1품 우의정 자리마저도 과감히 거부한 백의정승으로 당쟁에 휩쓸리지 않은채, 산림의 처사로서 85세 천수를 누린 조선 역사상 유래없는 큰 인물이다.

명재 윤씨 집안은 이처럼 명재의 확고한 선비정신의 가풍과 신념으로 적선과 긍휼을 실천하고 베풀어 민란과 대기근에도 아무 탈없이 가문의 부와 종가의 고택을 지켜왔으며 특히 6.25한국전쟁 때는 명재 고택이 북한 인민군 대대본부로 사용되어 미군 폭격 대상 제1순위가 되어 큰 위기가 닥쳤다.
그런데 같은 동네에 살았던 소작농의 큰 아들 박희동이 일본에 건너가 단기비행사 과정을 수료 후, 미국 군함의 굴뚝으로 돌격하는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활약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해 6.25전쟁때는 폭격기 조종사와 공군사관학교 조종훈련 교관이 되어 주인집 명재의 고택을 그 큰 위기에서 구해 냈던것이다.
박희동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 전투기를 몰고 미군 비행기를 격추시킨 유명한 조종사였다.

해방이 되자 그는 고향 논산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던 중, 6·25전쟁이 터지자 다시 전투기 조종사로 차출 되어 미공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진해 공군기지에서 날마다 미군들과 폭격지점을 논의하던 박희동 대위는 고향 노성면의 명재 윤씨 고택이 폭격대상으로 정해지자 강하게 반대하였다.
명재고택이 인민군 본부였기에 당연히 폭격대상이었으나 같은 동네 출신 박대위는 유창한 영어로 미군들에게 명재 윤증 집안의 유래와 적선들을 예로 들며 설득해 명재고택은 마침내 폭격을 면할수 있었다.

행여라도 명재 집안이 탐심속에 어려운 이웃들을 꼼꼼히 살피지 않고 갑질을 해 원한을 샀더라면 이때 종가는 불타고 없어졌을 것이다.
박 대위네 굶주린 가족들이 명재 고택의 추수한 나락을 알게 모르게 가져다가 연명을 해 살아남아 성공하여 그 은혜를 갚은것이다.
장흥에는 남도의 명산 억불산이 있다. 억불산 자락의 장흥읍 평화마을은 장흥고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평화 마을은 인근의 가지산 99고랑 골짜기에 국사봉 등 천연적 요쇄가 많아 동학혁명과 한말 의병의 근거지에 6·25전쟁 때는 빨치산 본부로 그 상처와 사연이 많은 동네다.
1894년 11월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한 동학군들이 최후로 집결했던 마지막 장소가 바로 장흥이요. 석대들판에서 벌어진 무려 일주일간의 전투에서 동학의 접주

이방언과 전설적인 소녀 장수 이소사 등 동학군 2천명 이상이 무라다 소총과 개토릭 기관총 등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 주차군과 친일파 이두황이 이끌었던 조선시위대에 의해 몰살을 당했다.
그 얼마나 희생이 컸던지 석대들 전투가 끝나고 장흥부 관아에는 ‘홀기(笏記)를 쓸 유생 하나 없는 장흥’이 되었다고 수군거렸다 한다.
홀기란, 향교의 제사나 큰 행사에서 식순을 한문으로 적어 놓은 식순표인데 식자층인 유생들이 모조리 이 석대들 전투에서 희생되어 장흥의 식자층이 줄어들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처절한 역사의 현장에서도 대가 끊어지지 않은채 선비의 가풍과 부를 유지했던 집안이 장흥고씨 무계고택(霧溪古宅)이다.
무계고택은 독립운동가 무계 고영완의 한옥이다.
1856년에 고영완이 사재를 털어 건립했으며 300년 넘은 팽나무, 소나무, 배롱나무 등 수목들이 3천평 드넓은 대지에 우거져 있다. 집 앞에는 장방형의 연못이 조성되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이 무계고택은 그 무서운 큰 난리속에서도 보존될수 있었던 까닭도 역시 지주였던 후손 고재극이 근대화의 물결에 재빨리 동승하여 고정관념과 욕심을 과감히 버리고 노비문서와 땅문서를 불태워 버린 후 소작인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증여한 순발력 때문이었다.
또한, 도로를 새로 개설할 때도 수천 평의 땅을 고을에 아낌없이 기부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후손들이 의병운동이나 독립운동에 참여해 의를 실천하고 평소 적선을 쌓았던 집안이었기 때문에 약탈의 표적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동학혁명과 6·25전쟁 때 장흥고씨 집안 사람들이 큰 피해없이 무사히 넘길수 있었 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수 봉소당, 영광 김씨가문을 소개 한다.

​그 무서운 여순사건 때 살상과 충돌의 한복판에 있던 여수의 봉소당이 오늘날까지 건재한 까닭은 소작인들에게 남몰래 덕을 쌓고, 세심하게 보살펴 준 조상들의 적선덕분이었다. 풍수지리학상 ‘봉황이 사는 집’이라 불리는 봉소당은 봉황의 날개처럼 드넓은 처신을 해 영광김씨들이 지금까지도 부를 누리고 있다. 한때는 영화 '가문의 영광'을 촬영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여수의 아름다운 바다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바로 영광김씨 종가인 봉소당이 자리잡고 있다.
​동네 이름은 봉강동으로. 모두 ‘봉’ 자가 들어간다. ‘강’은 봉우리의 뜻으로 봉우리를 봉황이 둘러싼 형국의 동네단다.
​1945년 해방 후 3년, 1948년에 좌우익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여순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여수다,
미군과 국군이 연합상륙작전을 펼쳐 여수를 포위해 수많은 시민들이 전투에 희생되거나 이념의 갈등으로 헤아릴수 없는 참극이 일어났고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봉소당의 주인 김성환은 당시 34세였다. 1만 2천석이 넘는 여수에서 가장 큰 부자요. 대지주였다. 여순사건이 터지고 폭동을 주도한 14연대 반란군 지휘부는 지주 김성환을 소환했다. 임시사령부인 여천군청 2층으로 호출한것이다. 인민재판을 열어 사형을 시키거나 착취 계급으로 몰아 아래층으로 끌고 내려가 죽창으로 찔러 죽이던 한치 앞을 예측할수 없는 살벌한 상황이었다.

김성환은 죽음을 각오한 채 오직 운명을 반란군 대장에게 맡긴채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반란군 대장은 경호원인 부하 2명에게 자리를 비우고 아래층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심문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신문만 계속 보고 있는것이었다.
무거운 침묵속에 시간은 흘러 30분이 지나도 아무런 말도 없었다. 오직 신문에 눈을 댄채 경계를 늦추면서 딴전을 피우는 것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곁을 돌아보니 창문이 열려 있었다.

뒤늦게사 도망가라는 신호로 판단하고 창문을 뛰어 넘어 냅다 줄행랑을 쳤다.

죽었다 살아난것이다. 김성환을 소환한 반란군 대장은 바로 봉소당 김씨네 소작농의 큰 아들이었다.
그 소작농은 자식들이 많아 소작료를 제대로 낼수가 없어 지주의 아들 김성환이 아버지 몰래 눈감아주고 여러가지로 보살펴 주었는데 그 은혜를 잊지않고 보은한것이다.

또한 김성환의 철부지 어린 아들 김재호도 끌려와 처형 직전에 돌아가는 상황도 모른채 찐밤을 오물오물 먹고 있다가 반란군에 가담한 머슴의 아들과 눈이 마주치자 "형! 밤 먹어!"하며 천진난만하게 조막손에 쥔 밤톨 두 알을 머슴 아들에게 건네니 한 참을 쳐다보다가 주인댁 종손 아들도 살려 주어 목숨을 건졌다 한다.
인간관계는 적선과 긍휼의 베품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아무런 조건없이 재물과 먹을 것을 없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적선과 긍휼을 실천할때 우호적 관계가 형성된다.

아스라한 시절, 말썽꾸러기 손주 녀석 손목 굳게 잡고 '하늘은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내리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린단다'는 선달 할매의 큰 가르침을 인생칠십고래희에 되새김질 하며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余慶)을 되뇌인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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