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농민군과 나주성 전투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3년 03월 23일(목) 0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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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일, 동학농민항쟁의 서막인 고부농민봉기가 발발했는데,그 발생의 시작은 고부군수 조병갑(1844~1911)의 추한 탐욕 때문이었다. 전라우도의 한 고을인 고부는 만경평야를 낀 쌀과 면포의 주산지였다. 조선 말 전라도 수령들의 착취가 어찌나 심했던지 자식 낳아 전라도 고을 수령을 시키는게 당시 사대부들의 최대 소망이었다. 풍년이 들수록 수령들의 착취는 심했고 농민들의 삶은 더 힘들었다.
이처럼 조병갑 같은 탐관오리들의 무모한 탐횡이 나라의 뿌리까지 흔들어 결국은 외세를 불러들여라 청.일 전쟁으로 조선 망국을 앞당긴 결과를 초래했다.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은, 신정왕후 조대비의 부친인 영의정 조두순의 조카로, 고모 조대비를 뒷배로 삼고 중앙과 지방에 뇌물을 뿌려 이중으로 안전장치를 해 놓고 온갖 탐학을 부린자였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해 백성들의 고혈로 배를 채우는 자였다.
멀쩡한 만석보를 놔둔채 그 밑에 보를 새로 만들어 수세 700섬을 착복하고 황무지를 일궈 배를 채운 철면피에 고부향교 장의였던 전봉준(1855~1895)의 아버지 전창혁을 불러 제 애비의 회갑잔치를 벌리겠다며 쌀 1000석을 걷고도 그것만으로는 양이 덜차 잔치에 쓸 쌀 60가마니를 내라고 욱박지르자 의협심이 강한 전창혁이 그 요구를 거부하자 곤장을 때려 요절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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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도 조병갑의 탐학을 인지하고 1894년 1월 익산군수로 전출시키자 뇌물로 구워 삶은 전라감사 김문연에게 또 뇌물을 주고 다시 고부군수가 되었다.
전창혁은 장독으로 한 달만에 죽고 초상을 치른, 서당 훈장이였던 전봉준은 농민봉기의 행동강령을 포함한,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농민1000명을 이끌고 고부관아로 쳐들어갔다.
감옥을 부수고 약탈한 곡식1400석을 군민에게 나눠 주었다. 얍삭 빠른 조병갑은 전주감영으로 도망을갔고 조병갑에게 뇌물을 받은 전라감사 김문연은 뒤탈이 두려워 조정에 보고도 못한채 전라감영 병사 50명으로 진압하려다 초전에 박살나자 뒤늦게 장계를 띠워 놀란 조정에서는 사태의 수습을 위해 용인현감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해 민심을 수습했으나 안핵사로 장흥부사 이용태에게 병사 800명 주어 파견했으나 탐관오리 이용태는 이 난리통에서도 한 몫 챙기려는 작자로 농민군의 집에 불을 지르며 동학 가담자를 색출한다는 구실로 아녀자를 연행해 겁탈을 일삼고 반항하면 살해하는 등 온갖 착취와 무자비한 탄압으로 이어지자 관망하던 동학접주 손화중과 김개남이 합세한, 1894년 3월20일 '백산봉기'로 진전되어 전봉준을 '호남창의소' 대장으로 추대하고 총관영에 김개남.손화중.참모령은 김덕명.손시영. 영솔장은 최경선으로 군진을 편제해 4월 6일 정읍 황토현 전투, 4월 23일 장성 황룡촌전투에서 장흥출신 이방언이 창안한 닭장태를 이용해 대승한 후 파죽지세로 4월27일 전주성에 입성했다.
전주감영이 점령되자 감짝놀란 고종 내외와 민영휘는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안일만을 생각하고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 5월5일 청의 군대가 조선에 상륙하자 그동안 낭인들을 첩자로 기용해 전라도 곳곳의 민심과 썩어빠진 조선 수령들의 부패를 탐지하며 민란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천진조약을 구실로 5월6일 일본군대도 상륙하자 초토사 홍계훈과 농민군 전봉준은 5월8일 전주화약을 체결했다.
농민군의 요구인, 탐관오리 처단, 노비문서 소각, 토지 평균 분작,과부 재가 등 12개조의 폐정개혁을 합의하고 이를 시행하기 위해 삼남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호남의 53개 고을 중에서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한 고을이 운봉과 나주였다. 1893년에 부임해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었던 나주목사 민종렬을 중심으로 아전.토호세력.전라우영 소속 군인들이 수성군을 결성해 나주읍성을 지켜냈다.
동학농민군은 나주성을 점령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주목사 민응렬도 나주를 빼앗기게 되면 적도들이 소굴로 삼고 장차 세력을 굳힐 수 있는 아성이 될거라는 판단으로 목숨을 걸고 사수 했다.
1894년 7월 5일 전투를 시작으로 11월 말까지 나주성 부근에서는 7번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수성군인 관군과 점령군인 동학농민군의 첫 번째 전투는 나주읍성 서쪽문의 서성문전투였다.
관군이 남긴, '금성정의록' 전투기록에는 7월 초 적의 괴수 최경선이 적당 수천 명을 거느리고 짓밟으며 본 고을에 직접 쳐들어왔다. 오권선은 괴수의 우두머리가 되어 군중들을 통솔하고 와서 금안동에 진을 치고 수 삼일 동안 침략을 가하면서 금성산으로 개미떼가 붙듯이 올랐고, 초 5일 어두울 무렵에 산 정상으로부터 물밀듯이 내려와 서성문을 공격하였다.
관군들은 지휘명령을 받은 즉시 대완포와 장대포를 연발로 쏘아대니 화염이 붉게 솟아오르고 그 소리는 산악을 울렸다. 성 위의 각 초소에서는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너희 두목들은 도망치지 말고 목을 바쳐라'고 외쳤다.적도들은 혼비백산하여 서북쪽으로 도망치면서 저희들끼리 엎어지고 밟히고 하여 사상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라 적혀 있다.
서성문전투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은 총관영 손화중과 광주접주 최경선.나주접주 오권선이 이끄는 연합부대였다. 서성문 전투에서 월등한 화력으로 인해 수성군이 승리하고 동학 농민군은 패배했다, 서성문전투는 그 후 전투에도 큰 영향력을 끼쳤다. 전투가 치러지기 전까지만해도 수성군은 동학농민군을 매우 두려워했는데, 첫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싸움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고 물러서지 않았다.
농민군의 나주성 함락이 실패하자, 녹두장군 전봉준은 8월13일, 부하 10여 명과 함께 나주성에 도착하여 목사 민종렬과 면담을 요구했다. 면담이 받아들여 금학헌에서 담판이 열려 전봉준은 동학집강소 설치 및 수성군 해산 권고를 요구했으나 거절되면서 담판은 결렬되었다.
10월 28일 목사 민종렬은 나주성을 수성한 공으로 호남초토사에 임명되었고 나주(현 나주초교)에 초토영을 설치하였다. 호남초토영은 호남의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본부역할을 했고 그해 12월 동학군의 최후 전투인, 장흥석대들 전투에서 체포된 접주 이방언과 이소사에 대한 가혹한 심문도 이곳에서 이뤄졌으며 농민군 680명이 처형되었다.
그후 10월15일, 손화중의 농민군은 재차 나주성 공격에 나섰다. 동쪽에서 20리쯤 떨어진 침산.선암.용진산까지 진출해 점령을 시도했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나주목사 민종렬은 성 밖으로 출정해 농민군 토벌했다.
600명의 수성군은 10월 20일 석현리에서 하룻밤을 잔 뒤 다음날 농민군 선발대와 접전을 벌였다. 수천 명의 농민군은 침산 뒤 봉우리에 진을 치고 공격했으나 수성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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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과 최경선은 11월 두차례나 더 시도했으나 관군인 수성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수만 명의 농민군들은 고막원 일대에 집결해 나주성을 재공격해온다는 첩보에 초토사 민종렬은 수성군을 규합해 일본군과 선봉장 이규태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수성군을 출동시켜 18일 고막원 동쪽 청림산과 호장산 일대에 모여 있던 농민군을 급습했다.
농민군들은 용감하게 저항했으나 수성군의 대포 등 무기의 열세로 후퇴했고 좁은 고막교를 한꺼번에 건너다 물에 빠져. 밀물로 많은 농민군들이 죽었다. 11월21일 다시 수성군은 포군 300명을 앞세우고 고막리일대의 농민군을 다시 공격했다.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의 농민군이 마지막 나주성 공격에 나선 것은 11월 23일이었다. 수만 명에 달하는 농민군은 금안면 남산촌과 태평정 등지에 진을 쳤다. 그러나 워낙 차이가 난 무기의 열세로 인해 감당을 못해 나주성 북문 밖 함박산까지 물러나고 말았다.
총 7차례를 공격했지만 농민군은 끝내 나주성을 점령치 못했다.
11월27일 결국 농민군은 퇴각하여 유덕동 덕흥부락에서 하룻밤을 숙영 후 미래를 기약하며 흩어지게 되었고 남진하던 농민군은 영암을 거쳐 강진 병영성을 점령하고 12월14일과 15일에 치뤄진 동학 농민군 마지막 전투지인 장흥석대들 전투의 패배로 갑오년 농민항쟁은 안타깝게 그 막을 내렸다.
얄궂은 운명속에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녹두장군 전봉준과 공주 우금치와 장흥 석대들에서 패전해 체포된, 동학농민군 대접주들이 한성재판소에서 수괴로 몰려 재판을 받고 1895년 3월 30일 처형 되었는데 시신마저도 못 찾은 채 그 재판정의 판사가 바로 탐관오리 고부군수였던 조병갑과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광범이었다고 한다.
예나 제나 못된짓을 자행한 벼슬아치와 변절자들이 오히려 승승장구한 아이러니한 역사적 사실들을 어찌 해석해야 될지 의문이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