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하정(夏亭) 류관(柳寬)과 영팔정(詠八亭) 이야기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3년 04월 13일(목) 13:55
월봉 김오준
1392년 7월17일 이씨조선이 건국하고 '조초청신(朝初淸臣)'이라 일컫는 조선 초기의 청렴한 신하로 류관, 맹사성, 황희의 세 정승을 꼽는다.
하정 류관(夏亭 柳寬)은 조선 500년 역사를 통해 청백리의 대명사로 크게 자리매김 되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영의정 자리를 탐하지 않은채, 4년 동안 우의정으로서 마흔살이나 어린 손자 같았던 세종을 모시며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조선의 기틀을 튼튼히 세운 공신으로 높이 평가 되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정1품 정승이 초가 삼간에서 비가 새면 우산을 받쳐 들고 우산없는 집을 걱정하는 여유와 위트는 탐심에 절여 사는 우리들을 퍽 부끄럽게 한다.
하정의 넉살을 군소리없이 지켜보며 가난속에서 아들들을 훌륭하게 키운 정경부인 안씨(安氏)도 훌륭한 내조자였다.
이런 사실들이 세종 이도의 귀에 들어가 5칸 기와집을 손수 하사했건만 하정은 사양했다.
하정의 청렴정신을 지근에서 지켜 본 13살 년하의 맹사성과 17살 아래 황희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와 세 사람이 함께 청백리가 되어 세종을 바르게 보필하여 월인천강(月印千江)의 태평세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 고장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는 60세 때 하정 류관이 전라관찰사로 부임하여 이곳을 지나다 경치에 반해 큰 아들 류맹문에게 정자를 짓게 했던, 영팔정(詠八亭)이 있다.
건물의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단층 정자다.
내부는 마루방 없이 우물마루의 대청으로 되어 있으며 사방은 벽체가 없이 개방되어 있다.
주석위에 원통형 두리기둥을 세운 민두리식 구조이다.
영암문화원과 종중에서는 국보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속에 이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고 있다고 한다.

하정은 조선의 풍수지리에도 밝은 선비였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정하지 못해 갈팡질팡할 때 "이 나라에서는 오직 송도와 한양만이 가장좋은곳이다. 지난번에 계롱산 아래 도읍을 정한다고 백성들이 걱정했는데 이제 한양에 도읍한다고 하여 모든백성들이 기뻐하고 있다.
한양의 형세와 도로.토지.그리고 수로가 송도와 같다.' 는 '정도론(定都論)'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이 '조선명신록'에 등장하고 영팔정이 있는 신북 모산의 터가 '호남명기' 라고 후손들에게 터를 잡아 주었고 그 후 모산 주위의 산이나 마을의 지명들도 모산의 지형을 비호하기 위한 지명이라고 전한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소박한 정자 영팔정이야 말로 선비정신의 바탕에 고도의 집약과 절제를 기저로 한 건축물로 자연을 바라보며 자연과 인간의 문제를 깊이 사유하며 시와 노래를 지어 풍류를 즐기고 후학을 가르치며 모산대동계와 향약을 태동시킨 구심체였다.
초가지붕이였던 정자의 이름을 처음에는 모산리의 '모' 자와 하정의 '정' 자를 따 '모정'이라 했는데 율곡 이이가 정자에 들려 류관의 선비정신을 기리는 8편의 시판을 정자에 걸어 '영팔정'으로 개명했다.
현판은 남인출신의 좌의정을 지낸 약천 남구만의 글씨요.
상량문은 하정의 9대손 약제 유상운이 썼다.
오랜 세월 동안 전란과 수마로 몇 차례 보수가 이뤄졌다.
중건자 류상운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송설체의 대가였다.
자는 유구, 호는 약재다. 1660년 25세에 진사시에 합격, 1666년 별시 문과 병과해 입격해 승정원 주서로
시작해 홍문관 교리, 대사간, 평안감사를 역임했고 1683년 청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후 이조판서, 좌.우의정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아들 류봉휘도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부자 정승으로 가문을 빛냈다.
박세당, 남구만 등 소론계열과 친분이 두터웠고 갑술환국때 장희빈과 장희재의 처벌을 놓고 직언을 해 고초를 당하기도한 올곧은 선비였다.
약제의 신도비 비문은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후손들은 하정의 청렴과 긍휼을 본받기 위해 모산마을에 '분비제'와 '죽봉사(竹峰祠)'를 지었고 이곳에서 공부한, 약재 류상운은 대과에 장원급제 후 숙종때 청백리로서 영의정에 올랐고 그의 아들 만암 류봉휘도 영조때 영의정이 되어 부자간 만인지상이 된 진기록을 남겨 류씨 가문을 명문의 반열에 올렸다.
영보의 연촌 최덕지의 후예들과 영계 신희남의 후손들과 학연, 혈연으로 얼켜 훗날 나라가 어려울때마다 의병과 농민운동의 지도자들이 영암에서 많이 배출된 배경에는 하정의 큰 가르침의 영향 때문이다.

1433년(세종 15년) 5월 7일, 하정 류관은 88세의 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날이 저물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데 하정을 애도하는 의식을 몸소 3일이나 강행했다.
장례식에 함께한 예조(禮曺)의 신하들은 날씨가 좋지 않다며 다음날로 미루자고 건의했지만, 세종은 슬픔속에 흰옷을 입고 눈물을 쏟으며 ​손수 제문을 지어 하정 류관을 애도했다.
​“경은 기질이 온후하고 성품이 넓고 깊어서, 학문은 고금의 사리에 통달하고, 재주는 정사의 요점을 꿰뚫었다. 중앙과 지방에서는 일을 성실하게 처리하였고, 세 왕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다. 경주에 나가 고을 원이 되었을 때는 백성들이 부모처럼 따랐고, 남방을 순찰할 때엔 백성들이 사모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사헌부 대사헌으로서는 이단을 엄혹하게 배척하고, 재상의 지위에 올라서는 언제나 원칙을 지키며 사사로운 일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으며, 창고에서 남아도는 재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지위를 낮춰 언제나 깔끔한 풍도를 지녔고, 덕은 높아도 교만한 태도가 없었으니, 선비들은 모범으로 삼았고, 관리들은 한결같이 존경하였다.”며 하정을 추모했고 집현전의 젊은 신하들에게도 세종은 "황희에게 정무처리의 해박함을 배웠고, 맹사성에게 삶을 즐기는 유연함을, 유관에게는 진정한 선비의 길을 배웠노라.'' 회고했다.
​​류관은 1346년에 태어나 이름은 관이요.호는 하정이다.
본관은 문화 류씨로, 고려시대 정당문학을 지낸 유공권의 7대손이며, 삼사판관을 지낸 유안택의 아들이다.
​26세 되던 1371년(공민왕 20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리정랑을 거쳐 봉산군수, 성균사예를 지내다 조선 개국을 맞이했다.
​성리학에 몰두해 신진사대부들과 뜻을 같이해 조선 창업에 참여해 원종공신이 되었다.
개국 후 직책은 종4품 내사사인으로 태조 이성계에게 이틀에 한 번 씩 국가정책을 강의하는 일을 했다.
​태조의 두터운 신임으로 간관의 수장인 정3품 좌산기상시에 발탁되었다.
하정은 말썽 많은 기복 조치를 취지에 맞게 시행케 했다.
​기복(起復)이란 신하가 부모상을 당했을 때, 국가를 위해 상복을 벗고 등청하는 제도다.
당시 관리들은 상을 당하면 3년상은 커녕 채 100일도 채우지 않고 상복을 벗고 관직으로 나오는 일이 많았다.
​하정은 3년상이 공통된 상례임을 강조하면서 나라의 중대사와 관계되지 않은 관리들은 반드시 3년상을 채워야 한다고 주청해 이를 관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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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 유관은 정2품 형조전서에 제수되었다.
개국 초기라서 사회가 어수선해 형법의 적용도 엄정치 못했다.
​하정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공평하게 법이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더 큰 문제는 고문이었다. 경국대전에 근거하여 시행하는 관리가 드물었다. 형관들은 피의자로부터 죄를 자백받는 데만 혈안이 되어 지독한 고문을 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정은 ​알현을 청해 “형벌 맡은 관리들이 생명의 귀함을 돌보지 않고 함부로 매질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백성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형벌을 다루는 관리들이 함부로 고문할 수 없게 하는 법을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끝까지 주청해 윤허를 받아 냈다.

하정은 79세에 우의정이 되었고 80이 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고하자 세종은 이를 허락치 않아 84세가 되어 은퇴했다.
56년간의 녹봉은 고아와 거지 등 빈민구제와 홍수로 무너진 다리를 고치는데 다 쓰고 비가 새는 초가삼간에서 우산을 쓰고 살았기에 세상사람들은 한양에 있는집을 '우산각 '이라 했고 겨우 비를 피할수 있다며 '비우당'이라 불렀으며 태종은 울타리를 쳐 보호해 주었다.
은퇴하여 한양 흥인문 밖에 살면서 말과 가마를 타지 않은채 사는 하정을 위해 세종은 가끔 음식과 선물을 하사해 늙고 병든 신하를 위로했다.
하사품이 내려지면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크게 베풀고 마을노인들에게 하사품을 나누어 주며 성은에 보답했다.
심지어 노비들까지도 일일히 챙기는 긍휼을 몸소 실천 했다.

하정의 6대손 통정대부 청계 류몽정(淸溪 柳夢井)은 29세에 금정면 청용리 산122 청계동 석대위에 서재를 짓고 망경대(望京臺)라 부르고 은거하며 학문을 탐구하고 강론했다. 아침저녁으로 한양을 향해 망배(望拜) 하다. 기축사화에 무고로 연좌되어 옥사한 장한 선비를 배출했고 또한, 후손인 송계(松磎) 류공신(柳公信)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해, 6년 동안 금정면 와운리 운동에서 시묘살이를 하면서 사친곡(思親曲)을 지어 바쳤고 시묘살이중 왜적이 침입하여 부근에 이르자 갑자기 안개와 구름이 자욱해 사방을 알아볼수 없게 해 송계와 마을사람들을 보호해 송계의 효성을 기리는 '류공신 효자비'(柳公信 孝子碑)를 운동마을에 세웠다가 신북면 모산리 구암마을 충효정(忠孝亭)으로 이건해 현존해 있다.
이처럼 하정의 청렴정신은 그의 여러 후손들은 물론이요.
'지봉유설'을 쓴 외손자인 지봉 이쉬광도 외할아버지를 본받아 청백리가 되었고 1755년 영조때 나주 괘서사건의 중심인물인 원교 이광사의 아들 이긍익도 외가 모산리에서 자라나 '연여실기술'을 저술, 실학을 제창 해 훗날 다산 정약용이 이를 계승하여 그 유명한 목민심서가 세상에 탄생한것이다.
이처럼 한 선비의 참 선비 정신이 한 세대는 물론 후세에 까지 충.효.의(忠.孝.義)를 아우르는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 본보기가 바로 조선 초기 정승 류관이 아닌가 생각한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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