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朝鮮) 최고(最高)의 카리스마 숙종(肅宗) 임금 이야기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3년 04월 20일(목) 1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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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에 즉위해 1720년에 58세로 별세했으며 현종(顯宗) 이연과 명성왕후(明聖王后) 청풍김씨(淸風金氏) 사이의 외아들로 1661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순, 자는 명보, 조선 중기 선조 이후 붕당정치 과정에서 쌓여온 남인과 서인 당쟁의 혼란스러운 시대에 출생했다. 숙종 이순은 그야말로 금지옥엽으로 아버지 현종의 사랑과 어머니 명성왕후의 커다란 기대속에 원자와 세자를 거쳐 14살에 등극해 조선의 27대 임금 중, 당파간 견제와 대립을 정략적으로 이용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손상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권을 구축한 후 환국정치(換國政治)를 구사해 신하들의 신권(臣權)을 철저히 제압한 무서운 군왕(君王)이었다.
선왕(先王) 현종의 외아들에다 모후(母后) 청풍김씨 명성왕후의 튼튼한 외가의 뒷배로 14세에 즉위하여 수렴청정도 없이 등극해 복잡하게 얽힌, 왕실의 구조적 문제를 교묘한 환국정치를 구사해 그 억센 서인 세력들의 기선을 단숨에 제압해 왕권(王權)을 안정시킨, 배짱과 카리스마가 뛰어난 임금이었다.
재위기간 46년으로, 아들 영조(英祖) 이금 다음으로 오랜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어머니 현종비(顯宗妃) 명성왕후는 세자빈에서 왕후로 그리고 왕대비까지 오른, 청풍김씨 출신 왕비로, 어찌나 성격이 칼칼했던지 숙종의 아버지 현종을 후궁(后宮) 한 명도 취하지 못하게 했던 실로 무서운 철의 여인 이었다.
명성왕후 김씨는 아들 숙종을 평하기를 "주상(主上)은 내가 낳은 아들이지만 도무지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털어 놓을 정도로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가 숙종 이순 이다.
숙종이 선왕 현종과 더불어 적장자 출신의 정통성 왕위계승과 더불어 당시 일당독재 집권세력인 서인 노론(老論)들의 집권이념인 국혼물실(國婚物失)과 숭용산림(崇用山林)의 모순이 왕권을 위협하는 큰 요소라고 판단하고 왕세자 시절때 부터 마음속으로 벼르고 벼르며 칼을 갈았다.
아버지인 현종이 서인들과 어머니인 명성왕후의 손아귀에서 그들의 입맛대로 정국이 흘러가는 모습에 분노와 참담함을 느꼈다.
그래서 숙종은 군왕으로서 배우고 지켜야 할 왕도수업(王道修業)을 제대로 받으며 외척(外戚)인 청풍김문(淸風金門)의 김우명, 김석주를 집권 후 우군으로 활용키 위한 든든한 울타리를 확보하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숙종이 세자(世子) 시절인, 현종 1년 1659년 기해년에 효종의 승하로 1차 예송과 1674년 현종15년 2월,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별세하자 살아있던 시어머니 대왕대비 조씨의 상복을 입을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사이에 갈등이 결국에는 2차례의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번지게 되었다.
당시 성리학(性理學)에 깊이 젖은 사대부들은 사가(私家)의 문제들은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적용해
처리했고 왕가(王家)에서는 국조오례의國條五禮義)에 따랐다.
남인(南人)들은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아 왕권을 중시해 종법을 가변적으로 해석해 효종을 인조의 차남이었으나 왕으로 인정해 "큰아들의 예를 적용해 맏며느리의 상복 기간을 3년으로 해야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서인(西人)들은 반대로 신권을 더 중시해 종법을 불변적(不變的)으로 해석, 효종(孝宗)을 소현세자의 동생인, 인조(仁祖)의 차남(次男)으로 인정하여 1년설을 주장, 심한 대립과 갈등끝에 서인들의 안(案)을 채택해 이를 끝까지 반대했던 남인의 주도세력이였던 해남 출신 고산 윤선도는 함경도 삼수로 귀양을 가야만 했다.
다시 세월이 흘러 15년이 지나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또 다시 자의대비의 상복기간을 놓고 논쟁이 재현되었고 인선왕후를 둘째 며느리로 인정해 서인들은 9개월의 상복을 주장했다.
남인들은 1년설을 주장하며 또 첨예하게 대립했다. 같은 서인이면서 송시열의 독주에 염증을 느낀 현종의 장인 김우명과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 동생인 조선 최고 모사꾼 김석주가 정국을 전환 시키려는 책략으로 갑자기 남인편에 가세함으로서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있었던 서인으로부터 남인들이 처음으로 정치적 승리를 했다.
예송 논란은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서로 상대당을 공격하며 계속 이어졌다.
현종이 승하하고 14살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서인측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과 그 일당들이 기해예송때 예법을 잘못 해석해 적용했다는 진주 유생 곽세건의 상소를 숙종이 받아들여 인조때 부터 현종까지 무려 4대 40년간 서인의 영수로서 무소불위로 신권의 상징인 원로 대신 우암 송시열을 단번에 제거해 숙종은 기선 제압에 성공해 서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중간보수를 손을 본것이 아닌, 가장 힘이 센 우암 송시열을 꺽어버린 것이다. 우암 송시열은 효종 임금의 사부(師父)로 일찌기 그의 정치적 소신을 피력한 '기축봉사'에서 명나라를 '존주대의(尊主大義)' 로 섬기며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한다는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주장한, 이미 멸망한 명나라를 자나깨나 섬기는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물든 골수들이 었다.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내고 은퇴 후 화양서원에 머물면서 만동묘를 세우고 재야 사림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윤휴, 허적 등 주자학에 반론을 제기하거나 자기의 눈밖에 난 정적들은 모조리 사문난적(私文亂敵)으로 몰아 축출 해 세간에선 "조선은 이씨의 나라가 아닌, 송시열의 나라다." 라고 조롱할 만큼 무소불위의 정치 권력을 가진 거목이었다.
이 거목을 단번에 숙종이 무너뜨린 것이다. 선왕 현종이 눈치를 살피며 못다한 숙원을 아들 숙종이 대신해서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다.
서인 노론파들의 국혼물실을 무시하고 중인출신(中人出身) 가문의 장희빈과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를 빈으로 삼은채 일당독재 서인들의 정치판을 환국의 드라이브를 감행했다.
숙종의 정치적 묘수인 환국정치의 과정을 살펴보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첫 테이프를 끊는다. 환국이란, 정치의 국면을 확 바꾸어 버리는 걸 일컫는 정치 용어다. 이 환국을 기기묘묘한 시점과 사건을 빌미로 집권여당을 야당으로 바꾸어 버리는 고도의 정치술을 숙종이 구사했던 것이다.
서인을 축출한지 6년간을 남인세력이 집권하자 그들은 나태해졌고 방심했었다. 당시 남인의 영수 영의정 허적은 궁중 비품인 기름 묻은 천막인 유악을 왕의 허락도 없이 빌려가 자기집 잔치에 사용한 사건이 빌미가 되었다.
허적의 유악사건 이후 허적의 서자 허견이 김석주의 각본과 연출로 역모사건에 말려들어 고변을 당한다.
숙종은 역모혐의를 적용해 허적과 윤휴 등 남인들을 사사 시켰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갑인예송으로 물러났다가 경신환국으로 정계에 다시 복귀한다. 숙종은 권력이 비대해진 남인세력을 축출하고 서인들과 손을 잡은것이다.
이때 남인들의 처벌 수위를 놓고 서인들은 강경한 노론과 온유한 소론으로 갈라지게 된다.
그로부터 흘러 세월 8년인 1688년, 숙종의 후궁이었던 장희빈이 아들을 출산했다. 이 아이가 후일 경종(景宗)이 된다. 숙종의 첫째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는 광산 김씨로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의 형 김만기의 딸이다.
하지만 20세에 천연두로 일찍 사망한다. 1681년, 21세의 숙종은 15세의 인현왕후를 계비로 맞이한다. 인현왕후 민씨의 아버지 민유중은 송시열의 절친으로 노론 세력의 핵심 인사였다.
인조반정 이후 숙종때까지 계속 '국혼물실'의 기치아래 서인 집안의 규수들만이 왕비가 된다.
이는 서인 정권 유지의 핵심 과제였다. 서인은 인조반정 이후 국혼을 잃지 말자는 구호를 내걸었던 것이다. 1688년 인현왕후의 23세 어린 나이를 감안하여 남인 장희빈의 아들 이윤의 원자 책봉을 서인들은 극렬히 반대한다.
특히 송시열은 원자책봉 반대상소를 계속 올린다. 숙종은 크게 노하여 1689년 숙종은 제주도로 83세의 송시열을 유배시킨 후 정읍에서 사약을 내린다.
1689년 기사환국이다. 이번에는 장희빈과 남인들의 손을 들어준것이다
5년의 세월이 지난 1694년, 숙종은 여인들에 대한 취향이 변해 달콤했던 장희빈에게 권태를 느꼈다. 서인의 김춘택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을 일으키자 남인들이 서인 일파를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화를 당한 사건이 갑술환국이다. 갑술환국 이후 장희빈은 폐출되고 인현왕후가 복귀한다. 거기에 영조의 생모인 젊은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와 서인의 모사꾼 김석주가 꾸민, 공작 정치에 숙종은 걸려들었다.
이번에는 숙빈최씨와 서인들을 택했다. 이처럼 당쟁을 조정하고 조율할 수 있었던 노련한 숙종의 능력은 적장자로서의 자신감으로 붕당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시키는 뛰어난 능력과 고도의 정치력을 구사한 소위 환국정치로 자신의 어려운 정국을 타개했던 군왕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지쳐버린 백성들에게 왕권이 강한 숙종때는 그런대로 백성들은 살만했다고 한다. 왕권이 강했기에 신하들은 왕의 눈치를 보느라고 부정부패가 그 만큼 줄었기 때문이다.
숙종은 조세개혁책으로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실시 해 백성들의 오랜 숙원을 풀어 주었다. 또한 나라의 경제 체제가 농업에서 상공업 시대로 변화하는 시기로 숙종 4년, 상평통보를 대량으로 주조하여 전국적으로 널리 유통시켰다.
당시 1냥은 쌀 20kg의 가격인 요즘으로 치면 6 ~7만원의 화폐 가치를 지녔다. 1전은 1/10냥, 1푼은 1/10전으로 지금 700원 수준이었다.
또한 숙종은 강화도에 본격적으로 돈대를 설치하여 전쟁 유사시 강화도를 피난처로 대비하고 한양 도성 바깥쪽 지역의 방어시설로 북한산성을 수축한다. 북쪽의 침입로인 북한산에 대규모 산성을 수축하여 북쪽 방비에 신경을 썼다. 그리고 북한산에 임시 거처인 행궁도 설치한다.
한양의 이중 방어 체제를 구축했다. 국경선도 서쪽은 압록강으로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면서 두강의 분수령 위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한다는 백두산 정계비를 1712년에 세웠다.안용복은 울릉도에 출어한 일본어선을 발견하여 이를 문책하고 일본까지 가서 사과를 받아냈다.
이밖에 숙종은 특히 단종과 사육신을 복권시키며 성리학 이념을 확대하기 시작한다. 숙종은 단종의 복권을 죽은 세조도 원했던 일이라고 주장하며 세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단종을 복권시키는데 성공한다.
사육신들도 당대에는 난신이었지만 후대에는 충신이라며 복권을 시켜 주었다.
특이한 사실은 기사환국의 희생자였던 송시열도 1694년 갑술환국 이후 서인들이 집권이후 복권시켜 준다. 그리고 송시열 문집을 '송자대전'으로 명명하게 한다.
병 주고 약을 주는 특이한 처방을 내리는 군주였다.
숙종은 14세의 나이에 즉위했지만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을 받지 않는 것이 매우 이례적이었다.
명성왕후 김씨나 외척세력들이 그만큼 숙종을 인정했거나 숙종이 이들 세력을 거부할수 있을 만큼 배짱도 두둑했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적장자로서 왕통을 계승해 국정 운영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치 지도자가 바로서고 백성을 위한 강력한 드리이브를 시도 했을때 백성들의 삶은 그나마 평온하였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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