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승 김우항과 단천 기생 항아의 사랑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3년 06월 15일(목) 10: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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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5년 예송문제로 귀양가게 된 우암 송시열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681년 문과 을과에 급제 했다. 우항은 환국의 줄타기를 구사했던 숙종때에 나라의 중요한 요직을 지냈으며 상사나 동료가 위기에 처하면 상소를 올려 구하려다가 유배길에 오른 의협심이 강한 선비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벼슬아치들의 최고 소망이었던 홍문록(弘文錄)과 도당록(都堂錄)에 1689년에 등재되었다. 홍문록은, 조선시대 홍문관원의 후보로 결정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는 제도다.
홍문관원에 결원(缺員)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만들었는데 홍문록의 유래를 살펴보면, 성종초에는 예문록(藝文錄)이었으며, 예문관에서 홍문관이 독립된 1478년(성종 9)부터 홍문록이 시행되었다.
조선시대 문무관의 인사행정은, 정기평가인 도목정사(都目政事)와 담당부서인 이조와 병조에서 정원의 3배수 추천방식에 의해 행해졌기 때문에 문관인사의 경우에는 이조(吏曺)의 독단이 컸다. 그래서 홍문관의 책임자격인 부제학과 상위직 동벽(東壁)과 하위직 서벽(西壁)이 함께 의논하여 본관록(本館錄)을 작성하고, 이를 이조에 보내면 이조에서는 이를 심사하여 이조록(吏曹錄)을 작성했다. 그후 이조록과 본관록을 의정부(議政府)에 이송하면, 의정부는 본관록을 중심으로 면밀히 심사하여 정부록(政府錄)을 작성하게 되고 마침내 홍문록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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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관에 결원이 생기면 비로소 이조가 홍문록 중에서 3인을 추천하고, 왕이 이 중 한 명을 낙점하여 임용했다.
홍문록은 3년마다 1번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결원에 대비한다는 제도의 목적상 홍문록의 수효가 부족하면 수시로 이루어졌다. 선발 인원은 보통 15명 정도였고 문장수준, 왕과 경사를 논할 만한 학문수준, 가문 수준의 세박자가 기본조건이었다. 주요 대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도 많았다.
도당록(都堂錄)은, 의정부에서 홍문관 관원 후보자를 선발한 심사 기록이다. 홍문관이 문한과 간쟁을 담당한 중요한 기관으로 관원은 특수한 절차를 거쳐 뽑았다. 먼저 홍문관원이 의논해 문신이나 문과급제자 중에서 후보자를 선발, 추천자 이름위에 동그라미를 치는 권점을 표기해 이조에 보내면 이조가 다시 정리해 의정부에 보낸다.
그러면 3의정, 2찬성, 2참찬, 대제학이 다시 권점해 최종 명부를 작성해 왕에게 올린다. 왕은 권점의 수가 많은 순으로 홍문관직에 임명한다. 이때 홍문관에서 작성한 것을 본관록, 이조의 것을 이조록, 의정부에서 작성한 것을 홍문록이라고 하는데, 도당록은 홍문록 작성을 위한 의정부에서의 선거및 심사기록이다.
도목정사(都目政事)는 조선 시대 매년 두 번 혹은 네 번 해당 부서인 이조와 병조에서 행하는 인사행정으로 도목 또는 도목정이라고 불렀으며, 1년에 한 번 행하는 것은 단도목(單都目), 두 번 행하는 양도목(兩都目), 네 번 행하는 4도목(四都目)이 있다.
조선시대 문, 무양반은 원칙적으로 6월과 12월에 두 번 행하고, 토관(土官), 녹사(錄事), 서리(書吏)도 양도목이었다. 잡직(雜職)은 4도목으로서 1월, 4월, 7월, 10월에 행하였다. 그러나 병사(兵士)는 6도목을 시행해 군기(軍氣)를 확립했다.
김우항은 장희빈의 아들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려는 숙종에 반대했던 노론당 우암 송시열 등 서인들이 숙청된 기사환국(己巳還國) 때 억울하게 곁에 있다 피해를 입게된 동료 이상(李翔)을 구하려다 철산(鐵山)으로 유배되는 고초도 겪었다.
우항은 성격이 외유내강(外柔內强)하여 올곧고 의(義)를 지키며 직간(直諫)도 서슴치 않았다. 유배에서 풀려나 홍문관 수찬, 교리, 집의 등 홍문관의 내직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1695년 경상도 관찰사, 1696년에는 회양부사(淮陽府使), 1697년에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후 다시 승지(承旨)에 임명되었다.
이 후 대사간, 대사성, 예조참판,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707년 한성부 판윤(判尹)이 되었다. 1708년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지내고, 1710년 호조판서로 임명되어 북한구관당상(北漢句管堂上) 을 겸임, 군무(軍務)를 독려하고 산성(山城)을 쌓으며 축조하는 임무를 성 완수하였다. 1713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1721년 한직(閑職)인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김우항에 대한 일화가 많다. 김우항이 출세하기 전 인렬왕비능을 관리하는 정8품 휘릉별검을 지낸 일이 있었다. 김우항 별검 휘하에 있던 종9품 휘릉참봉 권씨는 너무 살림이 가난해서 나이 50이 넘도록 장가도 못든 노총각 신세였다. 어느날 권참봉이 능 경내에서 나무를 하는 나무꾼을 잡아 데리고 왔는데, 이를 지켜 본 김우항은 그 나무꾼이 빈곤한 살림에 70세의 노모를 모시고 여동생까지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나무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무꾼을 훈방조치 후 노총각 권참봉과 나무꾼 누이동생을 결혼 시켜 주었다.
그 후 권참봉은 두 아들을 낳아 둘 다 진사시에 급제하는 광영을 얻었다. 김우항이 그 고을 감사가 되어 권참봉의 소식이 궁금해 권참봉 사가에 갑자기 들렸더니, 권참봉의 늙은 장모가 후원에다 칠성단을 차려 놓고 '우리 갑봉 어른! 꼬옥 정승 되게 하소서!' 하며 간절히 빌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도한 우항은 자기가 잘 나서 출세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권참봉댁 장모덕이었다고 파안대소 하며 권참봉댁과는 더욱 각별히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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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봉은 청백리로도 이름이 높았다. 거느린 식솔들이 많아 가정형편이 궁색했다. 아들 5형제에 딸 셋을 두었는데 맏딸이 혼기가 되어 정혼(定婚)을 하였으나 혼수 마련비 넉넉치 않아 어려웠으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형편대로 시집을 보내는 청렴한 공직자의 본을 보여 세상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한다. 김우항이 소과에 일찌기 입격 후 대과에 번번히 실패 후 한양 남산골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을때 일이다. 대과를 준비하느라 가사를 전혀 돌보지 못했고 과거에 거듭 네 번이나 낙방해 살림이 기울렀다. 과년한 딸들도 많아 시집을 보내야 할텐데 혼수를 마련할 길도 없었다. 생각다 못한 갑봉은 함경도 단천부사(端川府使)로 나가 있는 종중 십촌 형 김우점(金宇漸)을 찾아 갔으나 초라한 행색을 본 동헌 사령에게 거절 당해 동헌에는 발도 들이지 못하고 며칠 후 부사의 행차 길목을 지키다가 남여(籃輿)의 행차를 막고 ‘부사형님! 한양의 아우 김우항이 형님을 찾아왔습니다.’하고 소리쳤다. 10촌 형은 무관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군노에게 ‘저 사람을 동헌에 데려가라.’고 지시하고는 그대로 행차했다. 아무 말없이 동헌에 와 기다리고 있었지만 점심이 돼도, 저녁이 지나도 오지 않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기생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천부사는 돌아오는 것이었다.
김우항은 본체만체 기생들과 잡담만 늘어놓고 수다를 떨었다. 우항은 화가 치밀었지만 참고 새벽부터 굶어 우선 밥부터 달라고 했다. 잠시 후 나온 밥상에는 찬밥 한 그릇에 김치와 간장만이 전부였다. 완전 푸대접이요. 개취급 이었다. 한 동네에 살았던 집안 아우가 천리길을 찾아왔는데 이럴 수가 있을까? 하며 참았던 울화가 폭발했다. ‘여보시오, 사또 양반! 단천부사가 그리 대단하오. 내 굶어죽어도 이런 대접은 못 받겠소.’하고 소리치면서 우항은 밥상을 엎어버리고 관아를 나왔다. 객주집에 들어 화를 달랙고 있는데 이튿날 한 아리따운 여인이 찾아왔다. 어젯밤 단천부사 시중을 들던 기생 항아였다. 제가 관기(官妓)이기에 어쩔 수없이 사또를 모시지만 사또는 윗사람에게 지나치게 아첨하고 아랫사람은 함부로 대하는 김우점 사또의 행패를 날마다 지켜보면서 분을 참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양반들의 기백 없음과 오만방자한 사또의 처신에 전전긍긍 하던차 어젯밤 김선비님의 밥상 걷어차는 모습이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면서 단천에 머무시는 동안 자기 집에서 유하시라고 간곡히 청했다. 사양할 처지도 못 되어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섰다. 야트막한 산자락에 정취 있게 꾸며진 아늑한 집이었다. 돌아갈 여비도 없으니 할수 없이 몇날을 머무를수밖에 없었고, 항아 도 평소 자기가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사내다운 사내라고 기개있는 우항을 흠모하면서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을 나눴다. 그러나 단 꿈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다. 딸의 혼사 날짜는 다가오고 전후사정을 대충 짐작하는 항아가 여비에 혼수비용까지 마련해 줘 감격하고 손목을 부여잡으며 장래를 기약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집에 돌아와 딸의 혼사를 잘 마친 김우항은 항아의 은혜는 물론, 대과의 꿈을 접지 말라고 몇번이나 당부하던 그녀의 당부를 잊을 수가 없었다. 단천부사의 홀대에 치를 떨며 마음을 가다듬고 과거준비에 매진한지 3년, 대과에 급제해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다. 조선은 흉년이 들어 관북지방의 민심이 흉흉해지자 김우항에게 암행어사의 밀명이 내려졌다. 바로 그 길로 함경도로 달려가 각 고을의 정적(政績)을 탐문하면서 단천고을에 이르렀다. 그토록 그리던 은인이요. 정인(情人) 항아를 찾았다. 버선발로 뛰어 나온 항아는 거지행색을 보고서 내색 없이 반가이 맞아드리고 정성으로 지어 놓은 옷을 내어 입힌 후 그간의 소식을 물었다. 신분을 노출시킬 수는 없는 어사 김우항은 ‘3년 전 자네가 준 돈을 산적에게 다 털리고 집에도 들어갈 수가 없어 이때까지 유리걸식을 했노라’고 적당히 변명까지 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항아가 벗어놓은 헌옷을 치우려하자 우항은 낡았지만 소중한 옷이라며 치우지 못하게 말렸다. 눈치 빠른 항아가 달려들어 어사의 품속에서 마패를 찾아냈다.
'소첩도 그만한 눈치는 있아옵니다. 비밀이 누설되는 일은 결코 없을 터이오니 안심하시옵소서.' 하며 오히려 안심을 시켰다. 두 사람은 얼싸안고 해후했다. 며칠이 지나 김우항은 단천고을에서 어사출도를 하려 했다. 형 김우점이 밉기도 했지만 그 보다도 비행이 하도 많아 봉고파직(封庫罷職)을 시키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이었다. 항아가 조심스럽게 충고를 했다. '공사(公私)는 분명해야지만 친족의 윤리도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니 스스로 자진 사퇴케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김우항은 항아의 생각대로 마음을 바꾸고 어사 출도 없이 동헌에 들어가 부사의 죄목을 밝히고 부사에게 사표를 내라고 했다. 부사 김우점도 제 죄를 아는지라 어사의 처분에 백배사죄하고 사퇴를 했다. 한양에 돌아와 숙종께 복명하는 자리에서 공사를 엄격히 하지 못했음을 이실직고하고 죄를 청하였다. 처음에 진노했던 숙종은 자초지종을 들은 후엔 진노를 풀었다.
김우항은 단천에서 있었던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대로 아뢰었다. 흥미롭게 전해 들은 숙종은 '항아는 사대부 부인들의 귀감이 될 것이니 서울로 불러 경의 부실로 삼게 하라.'명 하셨고, 단천고을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항아는 가마에 올라타 한양으로 올라와 김우항 대감의 부실이 정식으로 되어 신분상승을 했다. 김우항은 조선 500년 동안, 김해 김씨출신으로 유일무이하게 정승의 반열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소과에는 일찍 통과했지만 대과에는 서른이 넘어서야 급제했다. 가난했지만 평생 재물을 탐하지 않았고 권참봉과의 작은 인연도 소중히 여기며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보살펴준 기생 항아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임금께 목숨을 걸고 사실대로 말씀을 드려 감동시켜 항아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여 71세까지 벼슬을 하고 73세의 수(壽)를 누리다 세상을 떠난 아름다운 사랑의 주인공이다. 이들의 사랑을 각색한 소설이 '옥단춘전' 이라는 설(說)도 있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