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살펴본 영암군과 마한(馬韓)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3년 07월 17일(월) 10:24
월봉 김오준
영암군청과 영암문화원 등 관계기관과 영암군민들의 혼연일체로 숙원사업인,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가 우리고장 영암군 삼호읍 나불도에 유치 되었다
예산 400억원 규모에 2025년 착공된다고 한다.
2023년 5월, '영암왕인축제'에서 보여준 마한문화 유치 퍼포먼스와 관련 영상자료는 대단히 인상깊고 환상적인 연출과 기획으로 크게 호평을 받았다.
마한문화센터가 건립되어 역사적, 문화적, 생산적인 센터로서의 그 역할과 구실을 다하길 간절히 염원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마한역사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발표된 문헌을 중심으로 살펴 보면, 한반도 이남 지역에 분포한 삼한(三韓) 중 그 하나인 서남부지역에 위치한 마한(馬韓)은, BC 1세기~AD 3세기에 경기, 충청, 전라지방에 분포한 54개 작은 군장국가로 각각 그 지배자가 따로 있었으며, 규모에 따라 신지(臣智), 읍차(邑借)라 불리었다.
재정분리사회였고 경제는 벼농사 중심에 철생산으로 산업을 중흥시켰다. 천군이 다스리는 소도(蘇塗)를 두었고 5월과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행사도 있었다.
마한은 진한, 변한과 더불어 고조선 이후에 생긴, 삼한 중에서 가장 세력이 컸으며 . 3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당시 마한의 주도세력은 목지국이었고 백제에게 패망하기 전 6세기 무렵까지 독자적 국가를 형성했다고 한다.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마한에는 54개 소국이 있었으며, 큰 군장국가는 1만호 가 넘었으며 마한세력들은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밀려 일본으로 건너 가거나 영산강 유역까지 밀려내려와 그 명맥을 겨우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가 건립될 나불도는 영암군 삼호읍 나불리에 있다. 나불도(羅佛島)는 영암군에 딸린 6개의 섬인 나불도, 외도, 문도, 구와도, 고마도, 서도 가운데서 가장 큰 섬으로 1981년 영산강 하구 둑이 준공되면서 육지와 연결되었다. 면적은 0.34km2, 해안선 길이 3km로 우리나라에서 408번째 순위의 섬이었다.
국도 2호선의 출발점에서 영암 방면으로 5km 쯤 거리에 영산강 하구둑이 있고, 하구 둑을 건너면 나불도가 위치한다.
나불도의 명칭은 지형이 ‘나발’ 처럼 생겼다고 하여 '나발섬, 나불섬, 나불도’라고 했단다.
고려 충렬왕 때 충렬왕이 어느 후궁에게 이 섬을 하사했다고 전한다. '왕이 후궁에게 선물로 섬을 하사하면 왕실이 크게 번창한다.'는 말이 있어, 충렬왕은 미모가 뛰어나고 마음씨 고운 후궁에게 어느 섬을 선물로 주여야 할지 고민하다 영암 월출산과 목포 유달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나불도와 계도, 문도 등 세 개의 섬을 하사하였다 한다.
그러나 나불도, 계도, 문도 등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무인도였다. 그래서 사람들을 이주해 살게 할 목적으로 “섬에 와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라” 라고 명하여 이때부터 사람들이 모여 들어와 살기 시작해 유인도(有人道)가 되었다 한다.
영암의 마한문화에 대한 문헌자료는 희박하고 발표된, 기존 자료 조차도 역사적 검증도 없이 구전이나 추정에 의존한 자료가 대부분이고 마한에 대한 새로운 기술들도 연구자들이 현장조사나 역사적 고증이 부족한 채로 발표되는 경향이 짙다.
앞으로 현장조사와 문헌연구를 병행하여 영암의 마한문화 역사가 바르게 정립되길 소망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영암지방의 마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많으나 삼한시대 마한 54국에 속했던 군장국가 침미다례로 부터 시작된다.
침미다례국을 주도했던 세력은 영암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해남 군곡리 세력이었고 4c후반 백제 근초고왕의 정복활동때 항복을 거부해 무참한 대학살을 당했다. 해남의 침미다례국과 영암 시종을 거점으로 형성된 반남의 내비리국, 나주의 발라국 사이에 낀 소국연맹체 영암땅 '일난국'은 침미다례국, 내비리국, 발나국과 함께 백제국에 복속되어, 월내군(月奈郡)이라 칭하고 다스려졌다.
일난국에 대해서는 마한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시점에서 미뤄두고, 주변국들을 지금까지 발표된 문헌과 사료들을 위주로 살펴보면, 침미다례는 초기 삼국시대에 마한 서남부에 위치한 소국연합체다. 해남군 송지면 군곡리에 위치했던 침미다례가 근초고왕에 의해 복속된 4세기 후 군곡리 세력이 몰살된 후에는 해남군 북일면 신월리 세력과 영암군 시종면 세력이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설이 있다.
이 일대는 기존 마한 연맹 내에서도 세력이 만만치 않았는데 백제가 3세기 중후반 천안의 목지국을 타도한 후 마한의 맹주국을 자처할 때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중국 서진에 별도로 사신을 보낼 정도로 세력을 과시했다.
이곳 세력들은 백제 근초고왕 369년 3월 무력으로 복속된 후에도 겉으로는 한성 백제를 인정하면서 자치력은 잃지 않고 다른 마한 세력과 공조하며 백제를 곤혹스럽게 했던것 같다. 이후 백제가 고구려에 밀려 남쪽으로 천도 한, 웅진백제 시기에 백제의 직접 지배 지역으로 편제되었으나 침미다례는 정체성을 고수한 채 간접 지배를 받은것 같다. 사비백제 시기에도 마찬가지 였을것으로 추정된다.
그 증거가 영산강 유역 세력들은 훗날 후삼국시대에도 후백제와 태봉 및 고려 사이에서 후백제 편에 서지 않고 해상세력인 왕건을 지지했던 사실을 들수 있다.
침미다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일본서기에는 침미다례(침彌多禮), '침'(침)과 해성부가 같은 '탐'(耽)을 넣어 읽으면 '탐미다례'가 된다. 일본서기의 훈독 '토무타레'(トムタレ)가 있다.
일부 사가들은 '신운신국, 신미국, 침미다례'를 동일한 나라로 보거나 계승된 나라로 간주했으며 520년대의 '양직공도'에 기록된 백제의 9개국 중 '지미'(止迷) 또는 신미국으로 표기되었다.
진서, 장화전에 따르면, 신미제국은 282년경 서진 제국에 사신을 보내 무제 사마염에게 조공할 당시 20여 개국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신미국과 침미다례국은 같은 나라인것 같다.
일본서에 따르면, 369년 3월 침미다례가 도륙당하자 주변에 있었던 비리(比利), 벽중(벽中), 포미(布彌), 지반(支半), 고사(古四) 등의 군장국가들이 스스로 항복했다고 하는데, 이는 침미다례가 최소 5개국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지역 종주국이었음을 암시한다.
중국 역사서에 적힌 마한 국명들의 한자 표기는 우리말의 이름을 당시 중국 한자음에 맞게 음차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에서 침미다례를 남만(南蠻)이라고 표현했으며 위례성에 수도를 두고 지금의 기호 지방에 근거한 당시 한성백제에서 볼때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침미다례(침彌多禮)의 고대 일본어 발음('토무타레', トムタレ) 등에 근거하여 오늘날 전라도 서남해안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침미’의 고대 일본어 훈이 ‘토무'(トム)이므로 백제시대 도무군에 해당하는 강진, 해남 일대다.
남북국시대에 이 지역에 설치되었던 침명현(浸溟縣)이 '침미'와 음이 비슷한 것도 살펴봐야 할것이다.
나주 일대 영산강 유역 세력은, 안성천 일대 세력, 금강 유역 세력, 섬진강 유역 세력, 전라도 내륙 중부 세력 등과는 이해 관계가 달랐고 근초고왕때의 앙금 때문에, 영산강 일대의 토착세력들은 백제가 대(對)고구려 전쟁으로 한반도 중·서남부를 규합하던 백제국에 대해 소극적으로 협력했을것이다.
근초고왕에게 무력으로 가혹하게 토벌 당한 역사적 사실을 쉽게 잊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침미다례는 백제국의 강대력한 무력침략을 체감한 후 일정한 선을 긋고 지켜가면서 협상하려 했고, 백제도 강압적으로 압박하지 않고 당근과 채찍을 통한, 유연한 자세로 침미다례를 다루었다는 기록이 백제서기에 등장한다.
전라도 서남부 일대 영산강 유역 세력들은 백제의 전성기인 동성왕, 무령왕 때에는 독자적인 외교력, 행정력, 군사력 등을 모두 잃었고, 그 일대는 백제가 직접 지배하는 지역으로 전환되었으나 연맹 체제에 속하는 모든 소국들이 어느 정도 자치력을 보유하는 마한 연합 체제를 거쳐 백제의 지배권으로 복속되었을거라는 주장에 동감한다.
백제는 개로왕 때 고구려 장수왕에게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경기,도 일대를 패앗겨 버린 백제 초유의 국가적 위기를 겪고 고전하다가 무령왕 때에 이르러 빼앗긴 경기도 일대와 황해도까지 회복한다.
이 전까지는 영산강유역의 침미다례 지역을 백제가 간접 지배 했었으나 고구려와의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와 자원, 인력을 얻는 일이 매우 중대해 직접지배로 전환했던것 같다.
침미다례의 독자적인 외교력이 크게 제한된 것은 근초고왕 시대 때부터 이루어졌으나, 백제가 침미다례의 풍부한 물산을 운용하게 된 것은 무령왕 때 부터일거라는 주장이 많다.
그 증거로 이 시기 침미다례를 구성했던 침미다례 호족들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이 양적, 질적인면에서 크게 향상되었는데, 백제에 대한 이 지방 세력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통해 상응하는 그 대가를 받았을거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백제가 6세기 초무렵은 침미다례를 직접 지배지로 편제하는 과정에서 영암 시종면, 나주 복암리 세력 및 광주 세력들은 우대해주었고, 한때 금동관(金銅冠)까지 받을 정도로 백제와 관계가 우호적이었던 나주 반남면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냉대를 받았다 한다. 반남세력이 주도하던 때 백제가 장수왕에게 한성 함락으로 일격을 당한 혼란기에 반남세력이 왜계 및 가야계 세력과 제휴하면서 백제로부터 이탈을 시도했다며 어려울 때 백제로부터 등을 돌려버린 반남 세력에 대해 괘씸죄를 적용했을거라는 주장도 있다.
침미다례와 백제의 관계를 요약하면, 한성백제가 마한 수장국인 목지국을 3세기 후반에 쓰러뜨리기 전에는 목지국 휘하의 대등한 제후국 관계로 출발했고, 목지국 복속 이후 4세기 후반인 근초고왕 시대 이전까지는 마한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대립 관계에 있었다가 369년 근초고왕의 정복 이후 마지못해 백제의 마한 내 주도권을 인정하는 상하 관계가 되어 간접 지배 관계로 있었으며, 475년 한성 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490년대의 어느 시점까지는 백제의 간섭을 뿌리치고 독립성을 회복했다가 이후 520년대까지인 동성왕~무령왕 때 웅진백제의 직접 지배 지역으로 편성되었다.
침미다례는 백제와의 관계에서 대립(약 100년) - 간접 지배(100년) - 독립(약 20년) - 직접 지배(약 130년)체제 였다. 침미다례를 주도했던 세력들인 해남 군곡리, 해남 신월리, 영암 시종면, 나주 반남면 등 세력들은 백제와의 관계가 원만치 않았을때 그 피해와 쇠락을 면치 못했음에도 백제에 쉽게 동화(同化)되지 않았던것 같다.
이러한 와중에서 광주 세력이 침미다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백제의 전진 기지 역할을 했는데 이 때문에 생긴 광주와 나주 일대의 악감정이 후삼국시대까지 이어졌다.
남북국시대가 되면서 옛 침미다례의 후예인 영산강 유역 호족들은 백제시대보다 기득권 제한을 더 받게 되었다. 신라가 통일 이후 더욱 짜임새 있는 지방 지배 및 행정체제를 갖추었다.
그나마 백제는 지방의 토호세력들에게 현의 수장자리를 내주었는데 신라는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를 택해 지방 호족들의 위치가 더욱 좁아졌다.
반남지역의 내비리국(內卑離國)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전(韓傳)에 삼한의 여러 소국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등장하는데, 이들 나라 이름은 당시의 중국음에 따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내비리국의 ‘내(內)’는 중국고대음이 ‘nuai’이고,북경음은 ‘nei’이다. ‘비(卑)’는 중국고대음이 ‘pjie’이고, 북경음은 ‘pei’이다.
‘리(離)’는 중국 고대음이 ‘ljie’이고, 북경음이 ‘li’이다. 그런데 ‘비리(卑離)’는 ‘평야’·‘읍락’ 등의 뜻으로서, 흔히 나라 이름 끝에 붙어 있는 백제의 ‘부리(夫里)’, 신라의 ‘벌(伐)’·‘불(弗)’·‘화(火)’ 등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 말이다.
‘내비리국’은 마한소국의 하나로 반남지역에 위치 했다.
내비리국 역시 근초고왕의 무력에 항복했으나 백제의 통치력이 온전히 미치지 못했고 침미다례국의 무차별 살상에 의한 반감이 오랫동안 큰채 오히려 바다건너 일본과 교류가 많았던것 같다.
나주 지역에 있었던, 발라국 또는 보라국이라는 이름으로 사서에 기록된 것을 소개하면, “제10대 나해왕 17년 임진(212)에, 보라국(保羅國)·고자국(古自國), 사물국(史勿國) 등 여덟 나라가 힘을 합하여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태자 내음과 장군 일벌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으니 여덟 나라가 모두 항복하였다.
삼국유사 피은 물계자조에 따르면, 212년 보라국 등 포상 8국이 신라의 변경을 침입하였다고 하며,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 스님은 보라국을 발라군의 전신으로 추정하여 지금의 나주로 보았다.
“금산군(錦山郡)은 본래 백제(百濟)의 발라군(發羅郡)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나주목(羅州牧)이다. 영현(領縣)은 3개이다. 다시 회진현(會津縣)은 본래 백제(百濟)의 두힐현(豆힐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봉황의 철야현(鐵冶縣)은 본래 백제(百濟)의 실어산현(實於山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광산 지산동의 여황현(艅황縣)은 본래 백제(百濟)의 수천현(水川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때 이름을 고쳤다.” 라는 기록이 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당나라 소정방은 영암땅에도 도독부를 설치 관할했으며 행정명칭은 웅진도독부 대방주 월내군이었다.
664년 당나라는 백제의 옛 땅에 설치했던 오도독부제(五都督府制)를 고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로 단일화하는 개편 작업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웅진도독부 관할 안에 동명(東明) 등 7주(州)를 설치하고, 각각 그 밑에 현(縣)을 소속시켰다. 그런데 7주 가운데 하나인 대방주는 백제멸망 직후인 660년 백제에 부임한 유인궤(劉仁軌)가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라는 직을 받아 통치했다.
663년 백제부흥운동이 종식된 후 유인궤는 대방주자사가 되었고 검교웅진도독으로서 백제의 옛 땅에 당나라의 총사령관이 백제를 식민 톰치했다.
대방주는 웅진도독부 산하 다른 여섯 개의 주들과 마찬가지로 664년에야 실질적으로 주 구실을 했던것 같다.
전라도 나주 다시(多侍)에 있는 죽군성(竹軍城)을 주의 치소로 한 대방주는, 지류현(至留縣) ), 군나현(軍那縣 : 함평), 도산현(徒山縣 :진도), 반나현(半奈縣 : 반남), 죽군현(竹軍縣 :다시), 포현현(布賢縣 : 나주) 등 6개현을 관할하였다.
대방주를 포함해 당나라가 설치한 웅진도독부 산하 7주는 신라가 부여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한 671년(문무왕 11) 모두 폐지되었다.
대방주가 설치된 당나라통치 기간 동안 당나라는 고구려와 신라와의 전투에 심혈을 기울였던 관계로 백제 옛 땅에 설치된 대방주를 제대로 통치하기가 어려웠기에 이때도 영산강 유역 토착 세력들은 나름대로의 자주적 생활을 유지했고 그 관습과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기(氣)의 고장 영암인의 기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것 같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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