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최고의 관상가 박유붕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3년 07월 25일(화) 15: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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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란, 해와 달과 다섯 산봉우리를 그린 그림이다. 이씨조선 왕조 어좌의 뒷편에 놓였던 병풍이다.
왼쪽엔 달, 오른쪽엔 해가 떠있고 폭포 두 줄기가 흐르는 다섯 봉우리가 있고 맨 앞에는 소나무가 있다.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일월곤륜도(日月崑崙圖)라고도 불린다.
왕이 죽을 때는 일월오봉도 병풍도 함께 묻힌다.
근정전, 인정전, 명정전, 숭정전, 중화전에 일월오봉도가 펼쳐 있었다.
일월(日月)은 군왕을 상징한다.
용봉지자 천일지표(龍鳳之姿 天日之表)란, 관상용어 그대로
군왕이 될려면 선천적으로 특이한 골상(骨像)을 타고 태어나야만 왕이 될수 있다는 관상가들의 주장이다.
왕은 한 사회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 중 단 한명이다.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이유가 관상가 김내경에게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는 질문은, 나에게 보통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우월한 잠재적 특질이 있는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몇차례나 과거에 실패하고 낙담해 전전긍긍하던 차
아내인 두씨부인의 권고로 관상학에 입문하여 십수 년간을 공부하고 왕기(王氣)가 서린 운현방을 찾아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만나 관상(觀像)으로 흥정을 끝낸 후
흥선대원군의 책사가 되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 전문가의 양심을 지키며 고집을 부리다가 비명에 사라진, 조선의 관상가 박유붕 이야기다.
예나제나 군왕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는 용인술(用人術)이었다. 나라에서 필요한 신하를 잘 골라 등용해야 하고 신하는 맡은 일을 잘 할 수 있어야 했다. 한말 1863년, 60년 세도정치를 청산하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정권을 잡은 뒤에 가장 힘든 문제가 사람을 판별해 인재를 등용하는 일이었다. 날마다 흥선대원군을 만나기 위해 밀려드는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옥석(玉石)을 가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애꾸눈 관상가 남거 박유붕(朴有鵬)을 책사로 삼아 나라일을 도모 했다.
남거 박유붕은 당대 관상학의 제1인자였다. 흥선대원군 옆에 앉아서 래담자(來談者)의 관상과 언행을 보고, 그릇의 크기와 인물됨을 판별해주는 중요한 일이 그의 업무였다.
애꾸눈 관상가 박유붕의 한 마디가 운명을 좌우할 정도였다.
박유붕이 관상에 입문한 계기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아내 두씨 부인의 내조와 처갓집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던것 같다.
과거에 수차례 낙방해 백수거사가 되어 방황하던 박유붕에게 궁여지책으로 부인 두씨가 관상학을 접하게 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1592년 임진왜란때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의 처남으로 알려진 인물이 두사충이다. 박유붕이 장가를 만경 두씨(萬頃 杜氏) 집안으로 갔는데, 두씨 집안은 임진왜란 초기에 이여송의 참모로 따라왔다가 조선에 눌러 앉았던, 충무공 이순신 장 군과도 막역한 사이였던 명나라의 도사 두사충(杜思忠)의 후손 집안이었다. 처가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풍수서와 관상서를 두씨부인을 통해 박유붕이 입수해 비기를 독파한 후 한양으로 상경했다. 한양의 높은산에 올라가 왕기(王氣)가 서린, 대원군의 사가(私家) 운현방을 발견하고 한숨에 달려갔다. 운현궁 앞마당에서 제기차기를 하며 놀고 있던 이하응의 둘째 아들 9살 짜리 이명복(李命福)의 관상을 보고, 앞으로 왕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 예언이 들어 맞아 이명복이 마침내 고종으로 등극하자 흥선대원군은 박유붕을 책사로 들어 앉혔다. 별호 백운학으로도 알려지게 된 인물이 바로 박유붕이다.
본관은 죽산 박씨며 호는 남거 (南擧), 별호는 백운학(白雲謔)이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63년, 고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박유붕에게 복채(福債)로 한양 삼선교에서 돈암동에 이르는 광할한 토지와 운현궁과 가까운 거리에 저택도 마련해 주었다. 박유붕이 살았던 45칸 기와집은 운현궁 바로 건너편이다.
오늘날의 수운회관 자리다.
박유붕은 날마다 운현궁으로 출근해 대원군의 8장사(壯士)들과 호형호제하는 측근이 되어 흥선대원군을 보필했다.
그야말로 물을 만난 고기처럼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어느날 흥선대원군은 민치록의 딸 민자영 규수를 며느릿감으로 데려왔다. 민자영의 얼굴을 처음 본 박유붕은 깜짝놀랐고 극구 반대하였다. 민규수의 관상은 흥선대원군 이하응과도 고종 이희 와도 서로 궁합이 맟지 않았으며 나라에도 크게 해가 되는 관상이라고 판단해, 한 번 반대하고, 두 번 반대하고, 세 번째도 계속 반대를 했다.
워낙 단호하게 반대를 하니까 흥선대원군은 "내 며느리를 보는 것이지, 당신 며느리 보느냐?" 하면서 크게 진노했고 그래도 박유붕은 눈치없이 계속 고집을 부려 흥선대원군의 눈밖에 났다.
이때 부터 박유붕의 운명은 하향곡선을 달렸다.
박유붕에 대한 일화는 차고 넘친다.
박유붕은 관상학을 독학 한 후 청도 운문사(雲門寺)에 있던 일허선사(一虛禪師)를 만나, 관상학의 교과서인 신상전편(神相全篇)을 사사(師事)받아 관상의 대가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의하면, 스승인 일허선사로부터 애꾸눈이 되면 더욱 신묘하게 관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박유붕은 스스로 한쪽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되어 관상의 깊은 경지로 몰입해 대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박유붕은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통큰 흥정과 거래를 통해 자기의 운명을 바꾸는데는 성공을 했다.
박유붕의 관상술에 빠져버린 흥선대원군으로 부터 복채로 넓은 토지와 언양현감의 관직까지 얻었고, 정3품 당상관 조수영 수사의 벼슬도 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며느리 감으로 여흥민씨 민자영을 데리고 왔을때 계속 반대만 할것이 아니라 차선책을 제시하지 않고 고집만 부리다 흥선대원군과 박유붕은 사이가 점점 멀어졌고 민비와도 원수가 되어 불행을 가져왔다. 그 후 여흥민씨측에서도 온갖 방법으로 박유붕을 회유했으나 단호히 거절했고 여흥민씨 측에서도 흥선대원군에게 토사구팽된 박유붕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한번 관상을 봐달라고, 사람을 보냈다. 박유붕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예감했기 때문에, 계속 미루다가 결국 인두로 나머지 한쪽 눈마져 실명케 해,
"눈이 멀어 관상을 볼 수 없다"며 자신의 운명을 피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사인도 밝혀지지 않은 채, 비명에 갔다는 야사가 전한다.
또 다른 한 설(說)은.
청도에서 독학으로 관상공부를 마친 박유붕은 어느 날 한양으로 올라온다. 당시 흥선대원군이 살던 운현방을 찾아가, 마당에서 팽이를 치고 있던 도련님에게 "상감마마 절 받으십시오."하고 땅바닥에서 큰절을 올린다.
13살 먹은 어린 아이에게 임금이라면서, 큰절을 올렸다는 보고를 받은 흥선대원군은 너무도 황당해, 애꾸눈 박유붕을 불러 자초지종을 하문한다. 박유붕이 대원군에게 고하기를
"제가 한양에 와서 보니 이곳 운현방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음을 보았습니다. 팽이를 치고 있는 명복 도련님은 제왕(帝王)의 상을 갖춘 분이라서, 큰절을 올린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고 박유붕은 흥선대원군에게 관상의 복채를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이 얼마를 주면 되겠느냐고 묻자, "제왕의 상을 보았는데 3만 냥은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달라는 것이 아니고, 4년 후에 주시면 됩니다."고 답했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가난한 시절이라 복채를 줄 수가 없었고, 약속어음을 써 주었다.
그로부터 4년 후 이명복은 조선의 26대 임금 고종으로 즉위하였고, 즉위 소식을 들은 박유붕은 복채를 받기 위해 대원군이 써준 약속어음을 들고 운현방으로 찾아갔다. 흥선대원군의 집을 찾아갈 때, 박유붕은 당나귀 4마리를 끌고 갔다. 당나귀 4마리는 3만 냥의 복채를 운반키 위한 용도였다.
3만 냥의 복채 외에도 박유붕은 대원군에게 벼슬도 못하고 죽으면 신위(神位)에 현고학생(顯考學生)이라고 써야 하니, 학생(學生)을 면하기 위해서 벼슬 한 자리를 청했다. 박유붕의 배포에 감탄한 흥선대원군은 3만 냥과 함께 청도 현감이라는 벼슬까지 내렸다고 한다.
소문은 날개를 달아 박유붕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출세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로 박유붕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박유붕이 출세를 하고 60세에 비참한 생애를 마감한 것은
두사충의 그 비전서 때문이었다.
두사충은 명나라 기주자사 두교림(杜喬林)의 아들로 상서 벼슬을 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두사충은 당대 풍수, 점술, 관상으로 일가 (一家)를 이루었던 사람으로, 조선에 귀화해 조선에 정착한 뒤 자신의 풍수, 점술, 관상에 대한 지식을 총정리한 비전서(秘傳書)를 남겼다고 한다. 그가 조선에 남은 것도 명나라가 곧 청나라에 멸망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박유붕은 처가에서 전해지던 이 책들을 아내 두씨를 통해 입수하여 공부하였고, 조선에서 제일가는 관상가가 되어 정3품 당상관의 품계도 받았다. 점쟁이라 천시 받았던 당시로서는 유례없는 출세와 부귀를 누렸었다.
박유붕에게 학문적 양심을 고수하다가 죽음까지 몰고 온 왕비 간택 사건은 흥선대원군이 60년 세도정치 안동 김씨의 세도를 척결한 뒤, 다시는 외척의 발호가 없는 조정을 만들자는 시도였고 큰 그림이였다. 그래서 고종의 중전 후보로 자신의 처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 민치록의 딸인 민자영을 점 찍어두고, 박유붕에게 관상을 보게 했던것이다.
박유붕은 장래 흥선대원군의 앞을 막게 될 것이라며, 3번이나 반대해 역정을 냈으나 결국 중전은 흥선대원군의 뜻대로 민자영이 간택되었으며, 훗날 박유붕의 예언처럼 흥선대원군의 앞길을 막아 철천지 원수 사이가 되었고 고종과의 금슬도 좋지 않았으며 민비의 탐욕과 사치로 말미암아 조선 망국의 지름길을 달리게 하는 시초가 되었다.
1868년, 귀인 이씨가 고종 이희의 서장자이자 첫 아들인 완화군(完和君)을 낳았다. 늦손자인 완화군을 총애한 흥선대원군은 완화군을 원자로 삼으려 했다. 이때도 박유붕은 완화군의 수명이 길지 않음을 알고 극구 반대를 했다. 또다시 격노한 흥선대원군은 박유붕을 관직에서 추방했으며, 흥선대원군에게서 버림받은 박유붕은 자신의 시대가 다 되었음을 알고, 자택에서 칩거하다가 비명에 갔다.
그의 죽음은 민자영이 중전으로 간택되던 그 시점을 전후해서라 한다. 민비는 시아버지가 될 흥선대원군의 눈에는 들었으나, 관상의 대가였던 박유붕에게 반대당하는 것이 꺼림칙해 사람을 보내 사정했으나, 박유붕은 나머지 한쪽 눈을 마저 지지고 장님이 되어, 더 이상 관상을 볼 수 없다고 거절 해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었고
매천야록에도 그가 '한쪽 눈을 마저 지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박유붕은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예감하자, 장님이 되는 극단책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관상가로서의 삶을 스스로 포기하고 마감한 것이다.
박유붕"이 죽은 뒤, 완화군은 그대로 원자에 책봉될 듯 했지만, 중전 민씨 측의 견제로 불발로 끝났고, 그후 완화군은 1880년, 13살의 나이억 병을 얻어 요절했고, 생모인 귀인이씨도 충격으로 사망했다.
아무튼 흥선대원군은 박유붕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척신정치의 폐단을 우려 해, 여흥 민씨 처가의 먼 친척 뻘 되는 부모도 없는, 고종보다 한 살 연상인 민치록의 딸 민자영을 며느리로 맞이한것이 결과적으로 대원군과 국익에 큰 손상을 가져왔다.
대원군이 택한 며느리 민씨는 얌전한 규수가 아닌, 무서운 발톱을 감춘 영리하고 겁 없는 철의 여인이었다.
시아버지와 권력다툼에서 이기려고 여흥민씨 친정식구들을 260명이나 요직에 앉혔고 벼슬을 마구 팔아 재물을 모아 자기 세력들을 키웠으며 미신을 지나치게 신봉하여 궁안에 '진령군:이란 무당을 상주시켜 아들을 낳기 위하여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 마다 천 냥의 돈과 떡 1섬씩을 바쳐 제를 올리고 선친의 묘를 4번이나 이장하며 밤 마다 파티를 여는 등 내탕금을 탕진하며 개화기의 모든 문명의 호화를 죄다 누리고 오후 3시가 넘어서야 고종이 출근해 겨우 정사를 처리할 정도였다고 하니 과히 그 일상 생활들을 짐작할 만 하다.
고종은 1m 60cm의 자그마한 키에 마음이 유약하여 국난의 타개를 위한 장기적 포석이나 대안도 없이 '언 발에 오줌 싸는 식'으로 나랏일을 처리하며 민비의 위세에 눌리고 아비 흥선대원군의 눈치나 살핀채 커피를 즐겨 마시며 알래스카를 3개를 사고도 남을 금광인 운산금광을 미국에 헐 값에 팔아 자동차를 구입하는 등 재물 챙기기와 사치에 눈이 먼 고집이 세고 무능한 왕으로 헤이그사건을 빌미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 되어 일제 주구들의 살해 계획에 의해 독약이 든 식혜를 먹고 1919년 1월21일 67세로 죽었다.
민비 역시 지금부터 130여년 전, 1895년 음력 8월 20일 을미사변으로 시해되고 만다.
우리가 배운 일본의 낭인집단이 아닌, 훗날 일본 제국주의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정규 일본육사 출신으로 조직된, 작전명 '여우시냥'의 특수암살단 56명에 의해 경복궁 곤녕전에서 광양의 대쪽 선비 매천 황현선생이 지적했듯이 "아녀자가 정치에 손을 덴지 10년 만에 결국 나라를 절단" 내고 48세에 비참한 죽임을 당한 후 녹산 남쪽에서 시체가 불 살라저 뼈를 옥호루 향원정 연못에 뿌린,
일국의 왕비를 살해 한 천인공노할 일제의 만행으로 2년 후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국장이 치뤄져 욍비에서 명성황후로 추존되어 뮤지컬 등 에서 "내가 조선의 국모다."는 한마디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당당한 조선의 아름다운 국모로 미화되어 홍릉 수목원에서 경기도 금곡으로 이장한, 슬픈 역사를 간직한 조선의 마지막 왕비였다.
관상과 풍수에 빠졌던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은 1898년 2월 운현궁 별장 아소당에서 세상을 떠나 아들인 고종이 장례식에도 참석치 않은 채 뒤뜰에 쓸쓸히 묻혔다.
10년 뒤 아소당 뒤뜰에서 파주로 옮겼다.
1966년 흥선대원군의 묘는 또 한 번 자리를 옮겨 남양주시로 이장했다.
파주 일대에 미군 군사시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박유붕의 예언대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살아 생전은 며느리와의 정치적 갈등으로 시달렸고 죽은 뒤에는 아들 고종에게 대노
(大老)의 대접도 받지 못한채 파란만장한 수난을 겪으며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난지 10여년도 못되어 이씨조선은 망국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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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인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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