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대하는 동서양의 태도'와 '아름다움은 과연 존재하는가'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3년 10월 26일(목) 10:01
김경호 변호사
《노자 도덕경 2장》에는 아름다움(美)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추함(醜)이 아니라 『惡』자로 표현되어 있었고, 그 생각을 접하면서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난다. 현재 우리의 삶은, 우리의 야전은 너무나 《많은 갈등관계》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창조적인 새로움》을 요구받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도전에 잘 응전》이는 기준으로, 지금 우리 시대에는 어떤 생각이 필요할까에 대하여 장설(長舌)을 풀어 보았다. 결국 위 과제상황에 잘 대처하기 위하여, 서양에서는 수 천년 동안, 우리는 조선이 망하고 서양의 근대 교육을 이식(移植)당하면서부터 학교를 통해 본격적으로, 인간의 삶에 필수인 진선미(眞善美)는 존재하는 것이고, 가장 완전한, 절대적인 진선미(眞善美)는 영원불변하게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대한민국 근대화를 위해서는 일정 단계 일정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지금 바로 우리가 살고 있고, 앞으로 우리 자녀가 살아 가야 하는 대한민국에도 적합한 생각인지 고민해 본 글이다.

『惡』는 우리들이 흔히 아는 악할 악(惡) 외에 미워할 오(惡)의 의미로도 쓰인다고 중학교 학문 시간에 배운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노자 도덕경 2장》에서 아름다움이란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이고 아름다움의 반대개념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라는 생각을 펼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서양의 아름다움하면 떠오르는 게 아름다운 형태미(beauty of form)인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조각상이 떠오른다. 서양은 외모의 비율을 중시하는 듯 하다. 8등신이니 황금비율이니 주로 형태의 아름다움 이야기를 많이 하는 듯하다. 그들에게서 아름다움은 형태의 완전성을 가진, 존재하는 실체이고, 추함은 그 외의 모든 실체인 듯하다.

그들에게는 외형으로 형태의 완전성을 갖추지 못하면 아름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양인 그들에게는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삶의 구석구석이 철저히 이분법적
인 사고 그 자체다. 사고의 명쾌성은 좋으나 항상 분리와 배제와 소외를 달고 산다. 이런 사고로 과학은 잘(?) 발전시켰고 역사의 일정 단계에서 물질문명의 발전을 위해 그 역할은 잘(?) 수행했다마는...

그러나 동양에서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고, 과학적으로 계측할 수 있는 영원불변의 형태의 완전성 (결국 神)이 아니라 그저 심미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의 핵심은 가시적인 형태의 비율이 아니라 심미적인 조화(Harmony)다.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에 조화가 사람들이 마음 속에 좋아하는 감정을 일으키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런데 그 조화는 어제 느낌과 오늘 느낌이 다를 수 있다. 역동적이라는 것이다.

늘상 똑같은 조화에서는 계속 좋아하는 감정을 일으킬 수 없고, 여기에 새로움의 요소를 창출해야 사람들은 계속 좋아하는 감정을 일으키고, 계속 아름답다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동양의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의 차이이다. 정리하면, 서양의 아름다움은 보이는 것을 중시하여 절묘한 비율의 형태미를 추구하여 영원불변의 완전성(神)을 강조하는 반면, 동양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심미적인 조화를 중시하여, 그 조화의 아름다움은 한번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어도 이를 지속하려면 새로움의 요소로 끊임없이 조화의 창조를 거듭해야 하는 '변화의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왜 굳이 이 아침 장설(長舌)을 풀고 있는가?

필자는 학교 다닐 때 선생님에게서 이런 생각을 배운 바 없다. 오늘은 진선미(眞善美) 중에 미(美)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으나 그 원리는 마찬가지로, 학창시절 그리고 군법무관 시절까지 《진선미(眞善美)는 존재》하는 것이고, 가장 완전한, 절대적인 진선미(眞善美)는 영원불변 존재하는 것이어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바》라고, 그 방향으로 살았던 것 같다. 노자 도덕경을 보면서 느낀 바는 ‘저건 서양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었구나.’ ‘그저 생각의 차이일 뿐이지 절대적인 진리의 자격은 아니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의 삶은 너무나《많은 갈등관계》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끊임없이 창조적인 새로움》을 요구받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도전에 잘 응전한다》는 기준으로 이를 위한 생각이 무엇일까? 먼저 서양의 진선미(眞善美)에 대한 생각이다. 이 생각은 완전한 것, 영원불변의 절대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인간의 생각에도 완전한 의견, 영원불변의 절대적인 의견이 있는 것으로 착각의 삶의 방향을 이끌어(우리 사회 곳곳에 나이 먹어 성공했다는 자들의 꼰대 생각, 현 정치권은 속수무책) 늘 끊임없이 자신만 옳다고 타인과 갈등을 일으키고, 민주주의 전제인 소수자의 의견 마저 무시하고 부정하며, 그 존재하지도 않는 '완전한 상태, 영원불변의 절대적인 상태'를 강조하면서 사고의 유연성이나 다양하고 창조적인 생각을 우리의 현실에서 방해받으며 살 것인가?

그리고 동양의 진선미(眞善美)에 대한 생각이다. 이 생각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심미적으로 조화로운 것》이라는, 존재가 아닌 느낌이고, 인간의 생각에도《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조화로운 의견》을 추구하는 삶의 방향을 이끌어, 늘 끊임없이 타인과 갈등보다는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며, 이것이야 말로 민주주의 전제인 소수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로, 그 사람들이 공감하고 좋아하는 상태, 심미적으로 조화로운 상태를 늘 추구하기 위해 늘 새로움의 요소를 창출하고 사고의 유연성과 다양성을 중시하며 살 것인가?

지금 우리의 삶에 어떤 생각이 필요한가? 그런데 학교에서는 여전히 강조하는 구호와 달리 실제는 성적으로 좋은 대학(?) 을 목표로 우리 삶에 실제로 필요한 생각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고, 사회에서는 종교가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자신이 믿는 신(神)이 절대자라고 가르쳐, 역시 우리 생각을 방해받고 살고있는데 이를 인식 조차 못하고 살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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