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군서 문인의 이야기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3년 12월 14일(목) 13:43
박석구 문인
겨울, 산골짜기로 들어가다
겨울비 그친 뒤, 모아 둔 감나무 장작을 패다가 몽중(夢中)의 아이처럼 뒤척이는 발걸음으로 무심히 늦은 1월의 월출산 작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감나무 모탕같이 부슬거리는 바위가 버티고 있는 낮은 벼랑 위 바래인 억새풀 속에서 잿빛 산토끼를 보았다. 아니, 그 눈을 보았다.
솔잎에서 가끔씩 떨어지는 물방울의 선명한 차가움.
동백잎에 반사되는 햇살의 가벼운 반짝임.
남은 얼음장 속으로 스미다 부딪혀 서성이다 내는 작고 맑은 물소리를 안고 가는 찬물의 투명한 무늬.
이것들이 토끼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밝고 환한 이 정적에서 보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끌어안는 검은 눈망울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고요.
순간, 토끼가 나를 쳐다보았다.

미동
무등산 의상봉 근처였던가? 천왕봉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능선을 바라보다, 그 부드러움에 편안한 긴 숨 한번 쉬고 고개를 돌리는데, 공작새 솜털 같은 자귀꽃 하나가 정금나무 잎들 위로 가볍게, 툭 떨어졌다.
갑자기 간지러움을 견디지 못한 정금나무가 부르르 떨었다. 내려다보던 싸리나무가 안타까운지 온몸을 두어 번 흔들어 진홍빛 제 꽃으로 자귀꽃을 쓸어내렸다.
서로의 어루만짐이 오래지 않았어도 자신보다 낮은 주위에 대한 배려를 바라보면서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바둥바둥 살아온 내 생을 초라하게 방류해 흩뜨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적막이 왜 깊게 다시 찾아오는지 그때 알았다.

유달산에 가다
사공에 뱃노래 가물거리며 잊혀진 지 오래.
저기 삼학도 큰 봉우리도 깎여 없어진지 오래.
부두에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과 이별한 지 오래.
목포역을 떠난 지 오래.

개나리꽃을 보러 가자는 초보 사진작가를 따라 잠깐 애틋한 감정이 일었으나 덤덤한 마음으로 이제는 ‘목포의 눈물’ 노래가 끊긴 역을 나와 유달산에 올랐다. 필 꽃들은 늦어진 계절 탓에 거의 피지 않았고, 그냥 수많은 돌계단만 오르내리다가 아, 첫 키스의 움푹한 자리에 앉아도 보고, 멀리 파도에 패인 외달도가 그 애 집이어서 늘 마중만 하던 선창가도 바라보고, 바다에서 쏟아지는 물빛은 역시 바람이 푸르러야 하얗게 반짝이구나 하는데, 갑자기 그 애의 까만 눈망울이 생각나 고개를 들어 한없이 파란 하늘만 바라보았다.
내 생애의 체온이 가장 뜨거웠을 때, 사랑의 이슬이 저 흰 바람꽃에 머물러 서로 두 잎이 되고 싶었을 때, 그 애는 서울을 향하여 밤 기차를 타고 그리움도 버리고 나를 떠났었지. 오래오래, 오래오래, 정말 오래전.
이제 푸른 쪽으로만 가는 세상이 가득해지는 늦은 오후에, 돌아가는 기차의 창에 마주하는 내 눈이 슬며시 젖는 것을 느낀다.

취한 밤
남광주시장 ‘꼬꼬댁 꽥꽥씨네’ 녹슨 닭장 안에 홀로 남은 무늬만 토종닭인 꼬꼬댁만 밤을 지키고 있다. 벽과 바닥 사이에 이미 여러 번 밟혀 줄기가 꺾인 민들레가 꼬꼬댁이 던져 놓은 깃털 하나를 이고 메마른 숨을 쉬는데, 꼬꼬댁은 담배를 피어물고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향해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빛을 포갠다. 그 눈빛이 터무니없이 초롱초롱하여 문득 몇 시간밖에 남지 않은 절명의 순간이 다가오는데도 삶의 의지가 묻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가끔 휘어진 부리로 통에 든 모이를 쪼아 먹지만 맛있는 표정이라곤 아예 묻어있는 것 같지 않다. 맞은편 김서린 창문으로 보이는 어설픈 시를 좋아하는 서희자의 팥죽집 탁자에는 고단한 표정이 가득한 아는 문인들 몇이서 주고받는 늙은 이야기와 소주병이 쌓이고 있다. 이제 서서히 문을 닫는 근처 국밥집 셔터 소리에 화들짝 고개를 들곤 하던 꼬꼬댁이 익숙해진 풍경을 그리는지 아랫눈시울을 지그시 올려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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