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비 군서 문인의 이야기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4년 01월 04일(목) 1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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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리를 잡고 바람벽이 닿도록 문을 열면 굴거리나무와 목백일홍, 감나무와 자목련이 바로 가까이에서 나를 맞이하고, 멀리 월출산 남쪽 끝자락에 앉은 작은 봉우리 몇 개가 다정하게 나를 반긴다.
내 청소년기 기억 속에는 6.25 때 행방불명이 된 둘째 큰아버지의 딸인 과년의 사촌누나가 겨울을 어디선가 보내고 지친 표정으로 돌아와 긴 잠을 잔 후, 그 문을 열고 멍하니 앉아 있던 모습이 어렴풋이 각인되어 있다.
올봄에는 작년과 다르게 비가 계속 내렸다. 4월 중순 어느 날, 자목련이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고 꽃봉오리 아랫부분이 햇살을 받아 한껏 두툼해지자 제비가 왔다.
내가 귀향을 한 첫봄에 한 쌍의 제비가 내가 외롭다는 것을 알았는지 처마 안쪽에 집을 짓다가 어인 일인지 이틀 만에 떠나버리고, 작년에는 아예 오지도 않더니 올해는 집을 짓기 시작했다.
한때 우리나라에 제비가 거의 없어진 적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를 내걸고 우리도 쌀밥을 먹어보자며 밭을 논으로 개간하여 통일벼라는 품종을 전국에 심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 벼는 예전 다른 벼에 비하여 수확은 두 배나 많았지만 병충해에 약했다.
그리하여 나중 통일벼가 다른 품종으로 바뀔 때까지, 전국 농촌은 벼가 자라고 익을 때까지 안개처럼 뿌옇게 하늘로 치솟는 농약과 농약 냄새가 뒤덮인 곳으로 변해버렸다.
그때 뿌린 농약은 지금처럼 친환경 농약이 아니라 오로지 병충해를 잡는다는 일념으로 개발된 것이어서 독하기는 이루 말할 수 없고, 특유의 싸한 냄새는 방안까지 침투해 그 냄새에 중독된 우리는 도시에 나가면 그 냄새를 그리워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농약을 뿌리던 이가 농약에 중독되어 논바닥에 쓰러지기가 부지기수였고 분무된 농약을 마신 제비는 길 가에서 푸드덕거리다가 죽어갔다. 산천에 메뚜기도 사라졌다.
대한민국은 배고픔에서 벗어났지만 그 뒤 제비는 당분간 볼 수가 없었다.
7월이 오고 얼마 뒤부터 폭염과 염천의 하늘이 이어졌다. 제비는 새끼를 4마리 낳고 마루는 제비가 싼 똥 때문에 나는 매일 그걸 치우느라 걸레질을 해댔다.
여명이 오자마자 내가 기르는 작물들에게 물을 주기에 바빴고, 그래도 악착같이 커서 작물들 사이의 틈을 메우고 자라는 민들레, 쇠비름, 명아주, 달개비, 둥근잎유홍초, 나팔꽃 등 잡초를 뽑거나 호미질 하느라고 날마다 땀을 바지가 흥건하게 쏟아냈다.
그리고 해가 나면 따가운 햇볕에 달궈지는 것이 싫어 샤워를 하고 마루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노란 부리의 입만 키운 듯한 제비새끼들은 부모가 번갈아 가져다주는 먹이에 목을 길게 빼면서 먼저 먹으려고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에 익숙해질 때면 햇살은 벌써 마당에 깔린 집 그늘을 지우면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왔다.
바라다보는 동백나무 뒤에 나있는 길은 햇살이 땅과 풀과 나무들의 잎사귀를 달구고 있는 모습 외에는 조용했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고 내달으며 친구를 부르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내가 여기 와 아이들이 학교 가는 모습이나 아기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이제 우리 마을은 제비만이 새끼를 낳아 기르는구나.’
사촌누나는 내 기억으로 유별나게 사랑을 갈구했다. 그녀가 막 사춘기를 지나가고 있을 무렵, 마을 어귀에 상여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옆 마을 총각과 사랑을 나누다 들켜서 할머니에게 머리를 숭덩 잘리고 고방에 갇힌 적이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이 끝나갈 가을 무렵에 역사 선생님의 애기를 뱄다고 울면서 큰어머니에게 밤중에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큰어머니가 그녀를 광주에 데리고 가서 애를 지웠다고 했다.
그녀는 그 후, 해마다 제비가 떠나가면 무엇에 홀린 듯 집을 나갔다. 그리고 제비가 돌아오면 남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큰어머니가 대빗자루를 들고 남자를 후려쳐 쫓아내곤 한 것이 두어 해가 된 것 같다.
그녀가 한해를 건너뛰고 집을 나가 또 남자를 데리고 집에 오자, 큰어머니는 더는 어쩔 수 없었는지 그 남자와 혼인을 시켰다. 남매를 낳고, 매형이 된 남자가 어느 날 밤중에 큰어머니를 찾아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워서 그녀와 도저히 살 수 없다고 난리를 피우고 울면서 나갔다.
“그년이 그러는 걸 난들 어쩌겠나.”
큰어머니의 긴 한숨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제비새끼들 부리의 노란색이 거의 없어지자 새끼들은 집 가로 나와 날갯짓을 시작했다.
더불어 똥도 무지하게 싸기도 해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걸레질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간경화로 죽은 내 친구의 집에 이사를 왔다고 5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떡을 한 접시 들고서 나를 찾아왔다.
그동안 나주에서 감자 농사를 짓다가 힘이 들어 팬션 사업을 하려고 여기저기 살 곳을 찾다가 이곳의 마을풍경이 마음에 들어 머물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마을 뒤 월출산 자락이 포근해서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더니 물끄러미 제비집을 쳐다보더니 한마디 했다.
“제비가 곧 날겠네요.”
오후에 옆집에 사는 장암아제가 와서 그 남자가 26살인 베트남 여자와 결혼을 했으며 한옥 팬션을 세 채나 지을 거라고 했다. 감자 농사로 돈을 좀 벌었다고 덧붙였다.
어느 날 아침에 제비들이 하도 시끄럽게 울어서 나가 제비집을 보니, 제비가 두 마리 밖에 없었다.
한 마리는 집 끝을 발톱으로 움켜쥐고 날갯짓을 하고 있고 한 마리는 마루에 떨어져 파닥이고 있었다.
그 이유로 어미 제비가 그렇게 시끄럽게 울어댔던 모양이었다. 내가 마루에서 파닥이는 제비를 손으로 잡으려 하자 그가 날아올랐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날아가는 새끼의 좌우로 부모 제비 두 마리가 감싸듯 같이 날면서 동백나무 위로 솟구치더니 어느새 사라졌다.
태풍이 오고 난 다음 날, 심어놓은 체리나무들이 많이 쓰러져 가지들을 세워 끈으로 묶고 있는데 아들과 함께 그녀가 왔다.
10년 만에 나를 만나러. 세월이 그녀를 그리 가냘프게 만들었는가 싶게 거의 뼈만 남은 모습이었다.
‘잘 지내셨어요?’라는 통상의 인사에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처음 느끼는 다정스런 미소를 지으며 내 볼을 쓰다듬었다.
“나, 간암이란다. 죽기 전에 널 한 번 봐야겠더라. 종손 얼굴 못 보고 죽으면 조상들 볼 면목이 없을 것 같더라.”
몇 가지 야채를 비닐봉투에 싸 아들 차 트렁크에 넣어주고 있는 사이, 그녀가 빈 제비집을 힐끗 보더니 작은방 문을 열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무들이 많이 컸구나. 산도 훨씬 푸르러졌고. 저 굴거리나무는 내가 심은 거란다. 항상 해가 바뀌면 새 잎을 위해 낡은 잎을 버린다고 해서. 나도 그리 살고 싶었단다.”
차가 떠난 후, 그녀의 삶에 마음이 아려왔다.
그때 이장의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온 마을로 퍼졌다.
“아, 아. 주민 여러분, 이번 새로 이사 온 산 밑 집에서 돌잔치를 한답니다. 모두 축하하는 뜻으로 그 집으로 모여 주십시오. 돌 선물은 절대 사양한다고 하니 가서 맛있게 먹고 즐겁게 놀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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