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승이냐 진리이냐? - 아리스토텔레스 재미있는 철학이야기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4년 01월 04일(목) 1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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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언젠가 자신의 고유한 사상에 이르게 마련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도 나이가 많이 든 플라톤의 가르침에 완전히 동의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이것이 서운했든지, 플라톤은 “망아지가 자기를 낳아준 어미 말을 뒷발로 걷어차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를 걷어찬다.”고 조금은 체념 섞인 어조로 읊조렸다.
그러나 플라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사상적인 견해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일 뿐, 결코 스승에 대한 악의나 교만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학설을 비판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매우 괴로운 일이다. 그렇지만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는 것보다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며, 나아가 학문하는 사람의 의무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다.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라고나 할까.
플라톤이 죽은 다음 아카데미아의 새 원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그의 친조카로서 별로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일로 비위가 상한 데다 아카데미아의 학문적 기풍 자체가 그가 생각하는 방향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고 만다. 그는 아소스에 아카데미아의 분교를 세우고 3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마케도니아의 필립 왕으로부터 당시 열세 살인 왕자 알렉산더의 스승으로 초빙되기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학원을 세우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으로 제자들의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숲이 울창한 가로수 길을 제자들과 더불어 산책하면서 강의하였기 때문에, 그의 학파를 소요학파(逍遙學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학원 안에서는 공동으로 식사를 하였으며, 매일 한 번씩 잔치를 베풀어 교제와 대화를 즐겼다. 결과적으로 학원의 교세는 아카데미아를 능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적인 평화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제자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론 원정 도중에 열병에 걸려 죽고 말았던 것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환호하는 가운데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측근으로 지목되어 정치범으로 고소를 당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증거가 충분치 않아 다시 신을 모독했다는 구실로 고소를 당하였다.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사람들로 하여금 두 번씩이나 철학에 대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라는 말을 남기고, 칼키스 지방으로 몸을 피하였다.(철학에 대한 첫 번째 죄는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일이라 해석됨) 그러나 이것은 흔히들 생각하듯 비겁한 도주는 아니었다. 당시 아테네에 있어서 피고인은 언제나 사형 대신 스스로 추방되는 쪽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듬해(기원전 322년. 62세) 오랫동안 앓아왔던 위장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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