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의 케렌시아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4년 01월 25일(목) 13:32
글을 쓰지 않아도 감은 익고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모과는 익는다.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검정콩은 껍질이 노래지고 하루 내내 말없이 있어도 사과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올가을은 지금 이렇게 가고 있다.

이제 순들이 조금씩 나고 있는 마늘밭에 저마다 먼저 영역을 키워가는 쇠비름, 명아주, 바랭이, 방동사니를 뽑으며 이들과 함께해 온 7년을 돌아다본다.

이들은 다들 꽃이 피고 조금만 방심하면 씨를 바가지로 땅에 흩뿌리는 습성을 가진 풀들이어서 반드시 꽃이 피기 전에 뽑아주어야 한다.

또 이들은 겨울만 제외하고는 봄부터 가을까지 제멋대로 씨앗이 발아되는 풀들인지라 같이 세월을 보내야만 한다. 하지만 이들은 1년마다 젊어지고 나는 1년마다 점점 몸이 무겁다.

한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일어나는 일이 지금은 거의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감나무 밑에다 오줌을 누면서 달을 바라보며 달처럼 여전히 혼자라는 처지를 한숨으로 느낄 때, 내게 다가왔던 인연들을 다시 그려본다. 멀어지고 잊힌 인연도 있고 지금도 이어가는 인연도 있다.

옥금이는 내가 처음 이곳으로 내려왔을 때, 진도에 사는 후배에게서 데려온 개다.

데려온 지 6개월이 지났을 때 6마리의 새끼를 낳았고, 사료비가 늘 걱정이어서 주점이나 음식점에서 남은 음식물을 갖다 주었더니 그 이듬해부터 매년 장염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몇 개월을 장염을 앓고 있다가 여느 때처럼 가을이 오자 나아가는지 코에 물기가 오르고 있다. 썩을 년.

초등학교 친구 중 하나는 새 품종의 나무를 어느 정도 키워 그런 일을 하는 이들에게 파는 일을 한다.

몇 년, 불루아이스라는 나무로 상당한 돈을 벌고 있다. 또 다른 친구는 방조제를 막은 벌판에 물을 공급하는 파이프 공사를 여태껏 하면서 먹고 산다. 일주일에 두세 번 우리 셋은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각자 주변의 일이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고 지낸다.

우리 집에 가끔 찾아오는 여인네들도 있다. 읍에서 음식점을 하는 김여인은 우리 집에 왔다가 동백나무에 반해서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은 찾아와, 가지고 온 음식을 같이 먹는다.

지금은 내게 관심을 보이지만 나는 간섭을 받으며 같이 산다는 게 두려워 그냥 지낸다. 같은 문학동아리로 지내는 나주에 사는 임여인은 한 달에 한 번은 우리 집의 맑은 공기를 마신다며 찾아오곤 한다.

요즘은 집에 있는 감과 사과, 무화과를 한 아름 따서 싱긋 웃음을 보내고는 도망친다.

읍에서 반찬가게를 하는 김여인은 내가 텃밭에 열무나 쪽파 등을 심어놓으면 그것을 뽑아 가져가고 그녀는 내게 반찬을 갖다 주며 지낸다. 가끔 나는 그녀의 집에 들러 커피를 마신다.

동네 사람들은 내가 여기에 온 초기에는 무슨 여인네라도 우리 집에서 보이면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살 여자냐?’ ‘언제 장가가나?’ 하며 말을 걸어왔지만, 지금은 여인네들이 떼로 몰려와도 관심은커녕 ‘너무 퍼주지 마.’ 하며 오히려 나무란다.

사실 내가 이곳에 다시 터전을 잡은 이유는 떠돌아다니는 삶에 지쳐서라는 표현이 맞다.

20대 말부터 지금까지 회사원, 제조업, 도매업, 시간강사, 학교매점, 건설업 등 살려고 몸부림치며 많은 업종에 종사하며 살았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졌고 실패의 연속에서 연락이 없다는 이유로 이혼도 당했다. 그리하여 내가 가진 것이 몸뚱이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어느 가을날, 귀향을 결심했다.

여기에 있으면 어둠이 지고 주변의 나무들이 검은색으로 자신의 우듬지를 검푸른 하늘 아래 내보일 때,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자연히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어렸을 적 바라보았던, 별들로 가득한 하늘은 아니지만 성긴 별들이 아직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 가을, 북극성을 좌우로 오른쪽엔 카시오페이아, 왼쪽엔 북두칠성이 빛나고 새벽에 오줌이 마려워 감나무 밑에 서면 자리바꿈을 하여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다.

저녁에 없던 오리온은 이미 남쪽 중천을 나른다.

내가 태어난 방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올해는 유독 감자, 고추, 깨, 땅콩, 서리태 등의 작물과 매실, 대추, 사과, 무화과, 감, 꾸지뽕 등의 과일들이 모두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주어 한결 이 가을이 고맙다.

2년 전부터 시작한 농어촌 민박도 꾸준히 손님들이 찾아오고 방과 후 강사도 4년째 이어가는 중이다. 다만 코로나로 인해 여행이나 사람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던 탓으로, 소재가 고갈되어 글을 쓰지 못해 안타까움이 인다. 하지만 어쩌랴. 속 썩을 일 없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할 필요도 없고, 간섭하거나 받을 일 없는 지금이 좋은걸.

내 곁에는 언제나 월출산이 있다. 월출산 작은 계곡을 몸이 찌뿌둥하면 오를 때가 많다. 가끔 개울물에 간을 보는 듯이 하얗게 피어 고개를 숙이는 억새들이 있는 곳을 지나갈 때, 손으로 쓰다듬으며 나는 그들에게 속삭인다.

‘아프지 마.’
‘항상 여기 있어 줘.’

모든 날은 다 흘러간다.

여명이 동쪽 창문에 하얀 손을 내밀 때, 나는 일어나 늘 장염에 시달리면서 나를 맹목적으로 반기는 유일한 말벗인 ‘옥금’이에게 물과 밥을 주고, 집과 집 주변의 작물과 나무들의 안녕을 물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하루 일을 끝내고 서쪽 마루에 앉아 넘어가는 붉은 해를 마주하고 오늘은 어떻게 살았나 되새김하며 담배를 피워 문다.

이제 나는 한 줄의 글보다 한 줌의 콩을 더 아끼며 사랑한다. 이제 나는 안부를 묻는 한 통의 전화보다 내가 키운 한 알의 사과를 더 사랑한다. 이제 나는 문득 떠오르는 한줄기 그리움보다 한 잔의 소주를 더 사랑한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여기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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