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무지몽매한

군서 문인의 이야기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4년 02월 29일(목) 12:38
<사진=박석구문인>
나의 영혼이 밤의 나라로 날아갈 때/ 나의 몸은 관 위로 뉘어져야 하고/ 그대 혹시/ 나를 태운 재가 다 깨끗이 사그라져버린/ 무덤가를 지나가게 된다면/ 오오, 그대여/ 무덤의 흙을 젖게 해 주오/ 한 방울의 눈물로

조지 고든 바이런의 ‘눈물’ 일부

‘역사의 양지로 나오지 못하면, 달빛에 젖어 신화가 된다.’
지리산 어느 이정표에 달필로 써 있던 글이라고, 책장을 정리하다 무심코 바닥에 떨어진, 묵은 『좋은 생각』이란 잡지를 펼치자마자 우연히 이 구절을 보게 되었다.
어쩌면 너무 감상적이고 어찌 보면 너무 철학적인 문구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나는 역사란 단어에 어색하고 양지란 말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달빛의 인생을 지나오면서 그럭저럭 살아왔지만 신화로 귀착되는 것에 의아심을 지울 수 없다.
아무도 모르는 신화라면 모를까. 차라리 ‘누구나 역사의 양지로 나오지 못하면, 아무도 모르는 신화가 된다’가 우리의 기죽는 인생을 좀 더 고양시키는 그럴싸한 말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병에 대해서 아직도 정말 무지하고 무관심 세상을 살아오고 있다. 만약 우리가 어딘가 여행을 떠나고자 할 때,
터미널 입구에 우리 몸의 병에 대한 유무를 알려주는 검색대가 설치되어 있다면, 박성오의 병은 환절기 감기정도였을 것이다.
우리의 후손들이 이런 시설을 꼭 검토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무지하게 잘생기고 바람둥이였으며 내내 열정의 삶을 살다간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의 이야기를 해보자.
그의 죽음은 양지의 역사에 의하면, 아니 햇빛의 기록에 의하면 ‘오스만투르크의 총칼에 피를 흘리면서도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전사했다.’고 죽음의 표현을 아름답기까지 하게 묘사했다.

1824년, 오스만투르크(터키, 지금의 튀르키예)에 저항하기 위해 38세의 나이로 그리스 군단에 합류하여 원정에 나섰을 때, 바이런은 이미 열병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 음지에 의하면, 아니 달빛의 신화에 의하면 그는 이렇게 죽었다.
여러 명의 군의관들이 바이런에 달라붙어 15킬로그램의 피를 뽑아냈다.
그리고 피마자기름에 다양한 약초를 섞은 관장약으로 대장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불덩이처럼 활활 타오르던 바이런의 육신은 만신창이가 됐고, 하룻밤이 지나자 죽고 말았다.

서구 문명의 적이었던 오스만투르크의 군대는 한 명도 보지 못한 채였다. 그의 영혼이 빠져나가던 그날 밤, 그의 관자놀이에는 밤새도록 거머리가 붙어 있었다.
당시 의료계에 의하면, 모든 병은 불결한 피에서 연유한다고 믿었다. 질병마저도 통치하고자 했던 그때, 불결한 피를 뽑아냄으로써 모든 병이 치유된다는 말도 되지 않는 사유로 그의 몸에 돌고 있는 25% 이상의 피를 뽑아버렸는데, 산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겠는가.

내 아버지 이야기를 해보자. 내가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늘 속이 쓰리다며 배를 쓰다듬고 다니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병원에 가보세요.” 하면 항상 “신경성이야, 신경성, 너희들이 말을 안 들어서 배알이 꼬여서 그런 것이니까, 말 잘 듣고 공부나 잘해.” 하고 자신의 아픔을 우리 4남매에게 퍼붓곤 하였다.
그리고 그 없는 살림에, 어디서 들은 민간요법인지 오리탕이 좋네 찹쌀죽이 좋네 하며, 납부금도 제때 못내 본 우리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드시던 모습에 우리 4남매는 위장병이 아닌 가슴이 서서히 치밀어 올랐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가 배를 쓸어안으며 “신경성이야, 신경성”이라고 우리에게 내뱉고, 어머니가 오리를 시장에서 사와 찜통에 넣고 석유풍로에 올려 삶고 계실 때쯤, 우리 4남매는 약속이나 한 듯 뒷산에 말없이 올라가 아버지가 그것을 다 드실 때까지 광주의 야경을 보고 내려오곤 하였다.
그러기를 두어 해, 기어이 아버지는 몇 번 검은 똥을 눈다고 근심을 하더니 어느 날 화장실 바닥에 생피를 흥건히 쏟아 붓고 말았다. 그때야 병원을 찾았더니 십이지장궤양이었다.
신경성을 이유로 그동안 방치했던 기름진 십이지장 한 곳을 궤양 균이 아무런 약의 제재도 받지 않고 호의호식하며 끝내 핏줄까지 건드렸던 것이다. 지금은 아버지가 “요새 뱃속이 안 좋아.” 하시면 나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신경성이에요. 신경성, 마음을 편하게 잡수시면 곧 나을 거예요.” 하면 아무 말도 못하신다.

우리의 몸은 자신에게 병이 들어오면 예고를 한다고 한다. 감기의 재채기도 바이러스를 몸에서 뿜어내는 행동이며, 설사도 우리 몸에서 못된 균들이 설치니 빨리 조치하라는 의미의 배설이고, 고름은 죽은 균들의 시체이며, 악몽은 심신의 나쁜 균이 당신의 머릿속을 헤집는 것이라고.
감기 바이러스는 약 300종이 있다고 한다. 만약 당신이 항상 감기를 달고 살아 이 300개 종류의 감기를 다 걸리고 죽었다고 치자.
그러면 당신은 엄청난 유병장수有病長壽를 누리고 살 수 밖에 없다. 오래 살려면 감기를 관장하는 신에게 빌자. ‘나,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감기란 감기는 모조리 걸리게 해 주소서.’ 감기의 신은 그러나 말이 없다.

노자의 말씀에 의하면 기자불립企者不立, 발끝으로 곧추선 사람은 오래 서 있지 못하고, 과자불행過者不行, 자기 걸음보다 큰 걸음으로 가려는 자는 멀리 가지 못한다고 했다. 이 나이에 역사의 양지를 추구할까만 아직도 큰 걸음을 걷고 있다면 멈추라. 바이런의 갈망처럼, 당신 무덤의 흙을 젖게 할 한 방울의 눈물을 보일 수 있는 자가 당신에게 몇 명이나 있는가.

지금 박성오의 마음이 발끝을 내리고, 뒷짐을 진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지 않는가.

덧붙임; 박성오는 나와 초등학교 동창이며, 그가 간암에 걸려 쓴 위로의 글입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죽고, 먹은 술을 한참 토했던 기억이 납니다.
영암일보 yailbo@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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