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벼락 때문에 수도사가 된 루터 재미있는 철학이야기(제29화)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4년 07월 05일(금) 1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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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명문 대학을 차석으로 졸업하였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벼락이 떨어졌다. 너무나 놀란 그는 “성 안나여, 나를 살려만 주십시오. 그러며 나는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하고 외쳤다. 결국 루터는 이 서약 때문에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수도원에서의 생활은 엄격하고 고되었다. 끊임없는 기도와 잦은 단식 철야, 그리고 추위를 이기는 일 등은 고문에 가까울 만큼 괴로웠다. 그러나 아무리 철저한 육체적인 고행과 인간적인 덕행을 쌓아도 루터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성직자가 된 루터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로마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은 신앙의 성지라기보다는 차라리 악의 소굴에 가까웠다. 도둑과 창녀, 걸인, 술집 등이 거리에 넘쳐흘렀고, 사람들은 오직 돈이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였다. 또한 독일 교회에서는 교회건축의 빚을 해결하기 위해 면죄부(免罪符-금전이나 재물을 바친 사람에게 그 죄를 면한다는 뜻으로 발행하던 증서)를 팔았는데, 설교에는 이런 내용도 들어 있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기부금을 내면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돈이 이 상자 속에 짤랑 하고 들어가면, 영혼은 지옥의 불길 속에서 튀어나오게 된단 말입니다. 심지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범해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 캠퍼스 안의 작은 교회 정문에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알리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었다. 이것은 오늘날 흔히 나붙는 대자보 수준이었고, 그나마 처음에는 교회의 주목을 끌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이 글이 인쇄되어 전국에 뿌려지는 순간, 독일인들은 열렬한 호응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처럼 루터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교황은 그에게 소환장을 보냈고,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나 루터는 여기에서 극적인 탈출을 감행한다.
얼마 후, 이번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루터를 이단자로 고발하였고, 결국 그를 화형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독일 국민의 대부분이 그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다시 대학에 돌아와 강의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많은 책을 써서 반대자들의 비난에 응수하였다. 군중들은 인쇄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루터의 책이 나오자마자 집으로 가지고 갔다. 심지어 가는 도중에서 만난 사람들의 간청에 따라 이 책을 낭독해 주어야 할 정도였다.
마침내 교황은 루터를 파문(破門-종교적,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것과 같은 형벌)하고 독일 황제에게 그를 추방하도록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신임 황제 칼 5세는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루터를 국회로 불러들였다. 체격이 허약하고 얼굴이 창백한 청년 학자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로 대변되는 기득권 세력과의 대결. 여기에서 루터는 가장 강력한 저항의 언어를 내뿜었다. “양심을 어기고서 행동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저의 신념을 거두어들일 수 없습니다.” 회의장을 빠져 나온 그의 뒤를 많은 사람들이 따랐고, 그들은 루터의 숙소에서 두 손을 높이 들어 환호성을 질렀다.
이후 루터는 발트부르크 성에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데 온힘을 다하였다. 마침내 이 위대한 작업은 열 달 만에 완성되었고, 4년 후에는 프로테스탄티즘(구 기독교인 가톨릭교와 대칭되는 개신교 사상)이 공인되기에 이른다. 그는 종교개혁자로서의 신념을 고백하면서 파란만장한 63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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