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에 걸친 투쟁-볼테르

재미있는 철학이야기(제35화)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4년 08월 16일(금) 09:18
프랑스 계몽기의 지도적인 자유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볼테르(1694년-1778년)는 언제 어디서 누구의 아들로 태어났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미 젖먹이 시절부터 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볼테르는 일생 동안 그 신과 싸워야 했다. 볼테르의 주된 적은 교회였다. 그는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해지고 있는 교회 안의 여러 가지 불법을 개탄하고 있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신의 이름을 팔아 우매한 대중에게서 돈과 명예를 빼앗아 간다고 보았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테르는 끊임없이 성직자들과 싸웠고, 교회와 결탁하는 정치 권력자들에게도 용감하게 맞섰다. 프랑스의 통치자가 검소와 절약을 이유로 왕실 마구간의 모든 말 중에서 절반을 팔아버렸다. 이때 볼테르가 던진 말은 “그보다는 차라리 왕궁에 득실거리는 당나귀 떼의 반을 치워버리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당나귀 떼’란 아무런 쓸모도 없으면서 나라의 창고만 축내는 왕궁 안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볼테르를 통치자들이 가만 둘 리 없었다. 그는 파리에 머무는 것조차 금지되었고, 심지어 바스티유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마치 전염성 세균 대하듯이 경계하였으며, 헐뜯고 배척하는가 하면 외국으로 추방하기도 했다. 그가 쓴 책은 금지도서로 지정되었고, 심지어 불태워 없애지기도 하였다. 어떤 신학교수는 볼테르 같은 사람이 세상의 빛을 보도록 허용한 신의 섭리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볼테르는 복잡한 연애사건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후작의 부인, 연극배우, 친구의 아내, 착한 시민의 딸, 화류계의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으며, 나중에는 심지어 자신의 조카딸과도 불륜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는 당연히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볼테르는 빚을 지기 시작하였고, 한동안 돈 문제로 고생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운이 좋았든지 그는 말년에 대단한 부자가 되었다. 대저택과 두 개의 별장을 소유하였고, 160여 명의 시종을 거느렸다고 한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그의 명성은 높아만 갔고, 그리하여 정신계에서는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세계의 모든 석학들과 수많은 편지들을 주고받았는데, 무려 2만 통 이상의 편지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의 희곡은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 주었으며, 소설 역시 판을 거듭하여 발간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볼테르는 한 사교장에서 귀족에게 불순한 말대꾸를 하였고, 그 귀족은 억센 사나이들로 하여금 한밤중에 볼테르를 습격하여 구타하게 만들었다. 분노에 찬 볼테르는 그에게 결투를 신청하고야 말았는데, 결국 그 귀족의 친척 되는 한 경찰 간부의 책동으로 말미암아 또 한 차례 바스티유 감옥에 들어가야 했다. 석방 조건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영국으로 떠나가야만 했던 볼테르는 그 곳에서 저서의 집필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출간된『영국인에 관한 서한』은 고국(프랑스)의 동포들에게 혁명의 불길을 당기는 화약과도 같았다. 그리하여 83세의 볼테르가 파리로 귀환할 때의 광경은 개선장군의 행차와 다름없었다. 이와 같은 기쁨을 맛보며 그는 바로 혁명 직전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묘비에는 ‘인간의 정신에 강한 자극을 주고, 우리들을 위해 자유를 준비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볼테르는 종교적 미신을 격렬하게 공격하였고, 디드로를 필두로 하는 백과전서파의 운동을 지지하였으며,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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