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 개의 서까래와 한 개의 대들보-원효(2) 재미있는 철학이야기(제44화)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5년 01월 10일(금) 0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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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그는 광대와 같은 복장을 하고 표주박을 두드리면서 화엄경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불렀다.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큰길 위를 걷기도 하고, 거지들과 한데 어울려 잠을 자기도 하며, 귀족들 틈에 끼여 기담(奇談)으로 날을 새우기도 하였다. 때로는 깊은 산중의 암자에서 꼼짝하지 않고 좌선(坐禪)으로 지낼 때도 있었으며, 무애당(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위치. 분황사에 딸려있는 방)에서 홀로 밤을 새우며 책 쓰는 일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동 때문에 그는 다른 승려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그러던 중에 왕이 불교의 경전인 『인왕경(仁王經)』(왕에게 설교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의 해설을 듣기 위하여 전국의 고승들을 불러 들였는데, 이때 원효도 추천되긴 하였다. 그러나 승려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그 자리에 끼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왕이 당나라로부터 새로 불경『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구했는데, 그 해설을 듣고 싶어 대규모의 법회를 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그 불경은 대단히 해석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이를 강의할 인물을 찾아낼 수 없었다. 이때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대안법사가 천거되었다. 하지만 그는 극력 사양하며, “이것을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원효밖에 없습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초개사(경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 원효가 자기 집을 헐어 세웠다)에 묻혀 있던 원효는 왕이 보낸 사신을 따라 나섰다. 그는 소를 타고 가면서 양쪽 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붓을 들어 강론할 『금강삼매경』을 풀이하였다. 그런데 이 다섯 권으로 된 책을 누군가가 훔쳐가고 말았다. 원효는 하는 수없이 왕에게 아뢰어 사흘을 더 연기하고는 다시 세 권으로 소(疏-임금에게 올리는 글)를 지었다. 이것이 바로『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다.
왕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과 전국의 명망 높은 스님들 앞에서 원효는 강해를 시작하였다. 그 강설은 흐르는 물처럼 도도히 장내에 울려 퍼졌으며, 위풍당당한 그의 모습을 찬양하는 소리가 고승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가운데는 처음부터 계속 눈물을 흘리는 한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요석공주였다. 감격에 겨워, 그녀는 “부처님 고맙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만 되풀이하였다.
마침내 “원효대사는 살아 있는 부처님이시다!”라는 외침이 장내에 쩡쩡 울렸다. 강론을 끝마친 원효는 장내의 고승들을 훑어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얼마 전 나라에서 백 개의 서까래(마룻대에서 도리 또는 보에 걸쳐 지른 나무)를 구할 때에 나는 감히 그 축에 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의 대들보(작은 들보의 하중을 받치기 위하여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건너지른 큰 들보)를 구하게 되니, 비로소 나 혼자 그 역할을 하는구나!”
원효(元曉, 617년-686년)는 상호 모순, 대립하는 불교의 교리들을 극복하기 위해 화쟁(和諍)이라는 자신의 독특한 개념을 사용하였다. 화쟁이란 어느 특정한 종파를 고집하지 않고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결시켜 사상 체계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또한 원효는 당시 왕실과 귀족 등에만 받아들여진 불교를 일반 백성들에게 전파하고자 노력하였다. 산속 깊숙이 자리 잡은 경천(전북 완주군 소재)의 작은 절에서 숨을 거둘 때, 원효의 나이 예순 아홉이었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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